선녀와 나무꾼으로 하는 하브루타

정글같은 세상에서 타오르는 인간성

by 마들렌


페미니즘은 2010년대 중후반을 뜨겁게 달군 수많은 개념 중 하나입니다.

인격에 대한 모든 종류의 폭력을 지양하는 페미니즘은 절대 다수가 절대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준 2차 대전 이후, 인격의 다양성을, 쉽게 말해 모든 사람은 각자 다르다는 것을 존중하는 사회문화 속에서 배양되었습니다. 가능한 모든 종류의 폭력을 절제하기 위해 최대한 아동의 의지를 존중하려는 현대 유아교육의 흐름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의 인권만이 아니라 소수 민족, 소수 인격, 장애인, 유아와 노인층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의미하며 이러한 가치관은 궁극적으로 참된 인간성을 지향합니다. 이런 역사적 단락 속에서 대두되었기에 페미니즘이 수많은 철학들 중 비교적 근대의 가치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페미니즘의 본질인 비폭력을 통해 인간성을 존중받고자하는 소망은 기록된 모든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을만큼 인간 존재와 함께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이번에 다룰 아주 오래된 동화, 선녀와 나무꾼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의 모습은 선녀와 나무꾼의, 그리고 이야기가 구전되어온 수많은 세월 동안 크게 변하지 않은 시대적 배경을 압축하여 보여줍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불평등이 극복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며 현대사회는 정서적, 이성적으로 그 불평등이 수용 가능한 한계 안에서 통제될 뿐입니다. 법치와 민주주의, 시장경제 개념이 전무한 채 계급이 공동체를 통제하던 고대사회는 불평등이 훨씬 극심했을 것이며, 따라서 계급사회의 최고 집단에 속하지 못한 대다수의 민중들은 안전에 대한 불안을 해소함은 결국 나보다 약한 다른 누군가에 대한 착취를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생각과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결과 인간 공동체는 타인을 착취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의 연속으로 구성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타인의 생명을 착취하는, 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할지라도 말입니다.


착취적 사회구조라는 렌즈를 통해 선녀와 나무꾼을 보면 첫 장면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입니다. 사슴은 사냥꾼에게 착취의 대상이었으며,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선녀를 팔아 넘깁니다. 권세자가 여럿의 부인을 두었던 고대사회에서 아내가 없는 상태는 나무꾼 역시 착취적 사회 구조의 피착취 계층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사냥꾼도 분명한 사회적 강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집에 병든 노모와 굶주리고 있는 처자식이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사슴을 잡아 지방 관리에게 세금으로 녹용을 갖다 바쳤어야 했을지도 요. 결국 돌고 도는 착취의 굴레 끝에 선녀는 나무꾼의 아내가 됩니다. 돌아갈 곳이 없어 나무꾼의 아내가 된 선녀의 모습은 당시 여성이 일반적으로 착취적 사회구조의 가장 아래층에 위치해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날개옷을 잃어버렸기에 어쩔 수 없이 나무꾼의 아내가 되었다는 이야기의 개연성은 여성에게 어떤 주거권도, 경제권도 보장해주지 않던 사회적 맥락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하늘의 존재가 아닌 평범한 여자가 된 선녀에게 누가 올지 모르는 산 속에서 나무꾼의 청혼을 거절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함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 사는 사회에서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인 가정이 사랑이 아닌 강요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입은 옷, 집안 배경, 경제적 능력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로 귀중히 여김을 받아야 하지만 날개옷을 도둑맞은 선녀가 행복했었던 하늘나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자녀를 낳고 살아가는 모습은 당시 여성이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세워나가지 못한 채, 인간사회에 의해 다산, 육아 등의 도구적 관점으로 규정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호주를 제외한 세계 모든 지역에서 이와 비슷한 전승이 발견된다는 사실은 선녀와 나무꾼에서 드러나는 비정한 세계관이 세상을 바라보는 인류의 보편적 정서임을 보여줍니다. 환상적인 이야기로 여성에게 정체성과 자존감을 빼앗아간 현실을 풀어낸 선녀와 나무꾼은 보면 볼수록 신비합니다. 그리고 그 신비로움은 이 이야기가 만평처럼 현실을 풍자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는 선녀의 모습에서 폭발합니다.




이야기의 전반부에서 사슴은 나무꾼에게 단서조항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아이가 둘이며 한 팔에 한 명씩 안고 날 수 있기에, 아이 셋을 낳기 전에 선녀에게 날개옷을 돌려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녀와 다른 등장인물을 구분 짓는 핵심요소이며 후반부에 펼쳐질 하늘의 존재로 정체성을 회복하는 힘의 근원입니다. 선녀가 하늘의 존재일 수 있는 이유는 그녀의 날개옷이 아니라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인간성에 있었습니다. 사냥꾼은 사슴을, 나무꾼은 선녀를 착취했지만 오히려 선녀는 희생합니다. 야만적인 사회가 강제한 결혼이었고, 애당초 원치 않는 자녀였지만 선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약한 자신의 자녀를 사랑하는 모성애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며 착취의 고리를 끊는 용기가 바로 하늘의 존재라는 고결한 인간성을 선포하는 것이 바로 선녀와 나무꾼의 핵심정서입니다. 나무꾼에게 날개옷을 돌려받고 하늘로 돌아갈 때 자녀를 데려가는 선녀의 모습에서 그녀가 날개옷의 유무와 관계없이, 즉 자신이 능력이 흥하거나 쇠함에 관계없이 자녀를 사랑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날개옷이 사라져 피착취대상으로 전락했다 할지라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의 인간성은 누구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다면 그의 현실이 녹록치 않아 얕잡아보인다 할지라도, 건강과 경제력을 잃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보다 도움을 받아야할 부분이 많다 할지라도 그 존재의 정체성은 땅에 비할 수 없는 고결한 하늘에 있습니다. 결국 선녀가 하늘로 올라갔듯이 희생의 가치를 깨닫는 사람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마침내 고결한 인간성을 회복할 것임을 선녀와 나무꾼은 수많은 시간들을 건너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정글같은 세상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채 폭력적인 방법으로 결합된 가정이 전면에 등장하기에, 선녀와 나무꾼은 어린이가 접할 때, 부모님 또는 선생님의 지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냥꾼이나 나무꾼을 성급히 악으로 단정하기보다는 이야기 속에 숨겨진 인간성을 찾아가는 질문이 동화가 함의하는바를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단 하루도 멈추지 않았던 전쟁의 역사는 착취의 형태로 안전에 대한 욕구를 채우려했던 시도가 결국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음을 보여줍니다. 역사를 통해 그리고 사회를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근거를 이해한다면, 무작정 선녀와 나무꾼에 등장하는 착취자들에게 비판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습니다. 무엇이 진짜 자신을 위한 길인지 모른 채 아둥바둥 살았던 나무꾼, 사슴, 사냥꾼은 이 세상에 내던져진 불쌍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선녀와 나무꾼을 읽는 시간동안 선악을 결정짓는 질문보다는 왜 사냥꾼은 간절히 사슴을 쫓았을지, 나무꾼은 선녀와 같이 살면서 매순간 행복했을지, 나무꾼과 같이 살면서 아이를 낳고, 자녀를 길러가며 선녀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등, 등장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각 인물의 입장에서 공감할 수 있는 질문을 통해, 아이와 함께 차가운 세상에서 피어난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위대함을 풍성히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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