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는 것을, 잘 해야 할 것을 잘 한 영화
남북 관계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이미 지겹게도 많이 봤다. <쉬리>부터 시작해서 <강철비>까지. 근데 마음에 들었던 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 어설픈 총격전과 억지스러운 감정 라인까지. 근데 <태극기 휘날리며>는 인정. <태극기 휘날리며>는 보다가 울었다. 사실 숨통 조이는 전쟁영화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지루했다. 도대체 언제쯤 재밌는 남북 관계 영화를 만날 수 있을까.
북한에 침투한 남한의 스파이 영화
영화 <공작>은 내가 처음으로 만족스럽게 본 남북 관계 영화였다. 황정민, 이성민, 조진웅 등 연기력으로는 손에 꼽히는 최고의 배우들이 출연했다. 영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공작>은 스파이 영화이다. 다만 특이한 점은 기존에 있었던 남북 스파이 영화 대부분은 남파 간첩들을 소재로 하고 있었으나, <공작>은 북한에 침투한 남한의 스파이를 소재로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하니, 영화를 보기 전 기대는 점점 높아졌다.
<공작>이 만족스러웠던 이유는 제대로 하지도 못할 폭발씬이나 총격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작>은 정말 잘할 수 있는 것들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긴장감을 주는 화면 구성이라든지, 중간중간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들이라든지. 특히,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칭찬받을만하다. 말하지 않고 서로 바라만 봐도, 관객들은 조마조마하며 침만 삼키게 된다. 만약 주지훈과 황정민이 권총을 서로 갈겨대는 상황이 발생했다면 <공작>은 그저 그런 따분한 스파이 영화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황정민과 이성민의 케미는 기대를 훨씬 넘어섰다. 비즈니스로 만난 두 사람이 진짜 동료가 되어가는 모습은 마치 이자성과 정청의 브로맨스를 보여주는 듯했다. 영화 끝나갈 때쯤 둘 중 한 명이 서로에게 형이라고 한 번 불러보는 걸 상상해보기도 했다(물론 그런 일은 다행히도 일어나진 않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시계를 들어 올리고, 넥타이 핀을 들어 올리는 장면은 많은 사람들의 입꼬리를 올렸을 것이다. 둘이 광고 세트장을 성큼성큼 가로질러서 부둥켜안았을지, 악수를 했을지, 뽀뽀(?)를 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조국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두 사람이 사상을 넘어 함께 모험을 떠나는 동료가 되어가는 모습은 관객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다
<공작>는 김정일이 출연한다. 얼굴만 딱 잘린 채 목까지만 등장하는 게 아니라, 얼굴까지 다 나온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근데 정말 김정일이 등장한 것만 같았다. 김정일 분장이 아주 사실적이어서 놀랐다. 분장이 떨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세트장에 냉동고까지 준비했다니 말 다했다. 이효리도 등장한다. 영화 전반적으로 사실성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들을 많이 설치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감한 정치적 사안도 등장한다. 97년 대선을 기억하는 관객들은 영화에 더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하지도 못할 총격전이나 폭발씬은 건드리지도 말자
인물들 사이에 있는 팽팽한 감정선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다소 지루해질 수도 있는 영화다. 처음엔 사실 조금 지루하다. 그런데 그 지루함을 참고 이성민이 황정민을 조금씩 믿고,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따라가 보시라. 제대로 된 영화 한 편 봤다는 생각이 든다. 총 한 번 안 쏘고, 폭탄 한 번 안 써도 이렇게 재밌는 남북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배우들의 신들린 듯한 연기력이 한몫했겠지만. 다른 감독들이 본받을만한 작품이다. 제대로 하지도 못할 총격전이나 폭발씬은 건드리지도 말자는 교훈은 모두가 기억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