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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쾀 Aug 27. 2018

행복은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거니까

<이터널 선샤인> 

<러브 액츄얼리>, <노팅힐>을 뛰어넘는 로맨스 영화가 있다면 바로 <이터널 선샤인>이지 않을까. 이런 영화를 이제야 봤다는 사실이 창피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렸을 때 봤으면 그냥 어른들 사랑 영화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니까. 코미디 배우로 잘 알려진 짐 캐리와 <타이타닉>의 케이트 윈슬렛이 주연으로 출연한 <이터널 선샤인>은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이터널 선샤인>은 평범한 영화 플롯을 따라가지 않는다. 조엘(짐 캐리)가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의 가장 최근 기억을 지우는 역순으로 진행된다. 헤어질 때부터 시작해서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식이다. 뜬금없이 기억을 지우냐고? <이터널 선샤인>에 있는 유일한 SF 요소는 바로 원하는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시술소(라쿠나사)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것과 관련된 물건들을 갖고 오면 그 물건들을 보고 연상되는 기억을 추적해서 삭제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평범한 연인이었고, 서로에 대한 싫증으로 결국 이별한다. 둘은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로 한다. 

조엘의 기억이 지워지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보면 클레멘타인에 대한 추억은 사라져있을 것이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기억을 지우는 시술은 SF 같긴 하지만, 사실 이별한 연인이 추억을 잃어버리는 과정을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드러낸 요소이다. 헤어지고 난 후, 시간이 꽤 흐르고 나면, 가장 최근에 있었던 힘들었던 기억들은 모두 사라지고, 아주 오래된, 반짝반짝 빛나는 추억만 남아있다. 조엘 역시도, 지우게 되는 클레멘타인에 대한 대부분의 기억이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이다. 시술을 멈추어달라, 이 기억만큼은 지우지 말아달라고 외치는 조엘. 만약 그 기억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망설이지 않고 뒤돌아섰던 기억이었더라도 똑같이 외칠 수 있었을까. 

결국,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운다. 자신의 기억이 지워졌다는 기억조차도 지워진 채로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한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되고, 다시 서로에게 끌리게 된다(운명인가). 라쿠나사의 내부자의 도움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기억이 지워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들은 원래 연인이었고, 서로에게 질리고, 따분하고, 꼴 보기 싫어져서 헤어졌다는 사실도.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망설인다. 서로에 대한 기억이 1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라도, 관계를 이어가다 보면 옛날처럼 서로에게 질려버려서 헤어지게 될 것 같아서. 하지만 로맨스 영화 대부분이 그렇고, 현실이 그렇듯 둘은 다시 시작한다. 나중 일은 역시 나중 가서 걱정할 일이다. 지금 이 순간이 빛나고 있는데, 어두워질 나중을 걱정할 이유는 없다. 


운명같은 끌림은 너무 밝게 빛났던 기억의 흔적 아니었을까

<이터널 선샤인>은 정말 현실적이라서 아름다운 영화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결코 특별한 연인이 아니다. 알 수 없는 끌림으로 만났다가, 밥 먹는 모습도 꼴 보기 싫어져서 헤어졌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끌림이 있다. 끌릴 사람은 어차피 끌리게 되어있는 걸까. 어쩌면 이 끌림은 너무 밝게 빛났던 기억의 흔적 아니었을까. 그 흔적이 남아있는 한, 우린 언제든지 다시 밝게 빛날 수 있다. 굳이 똑같은 사람을 다시 만나지 않아도, 흔적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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