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할 때 난 제일 행복하다

합법적으로 멍 때릴 수 있는 시간

by 느쾀

누군가 나에게 하루 중에 어떤 시간이 제일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샤워하는 시간'이라고 답할 것이다. 밥 먹는 시간, 게임하는 시간, 영화 보는 시간 등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시간은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큰 행복을 주는 시간은 다름 아닌 샤워하는 시간이다. 샤워하는 시간은 길면 길수록 더 좋다.


샤워할 때 가장 행복하다

나에게 샤워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일종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비몽사몽 샤워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줄기 안으로 들어가면 그때 비로소 하루가 시작된다. 사실 나에게 샤워하는 시간은 몸을 씻는 시간이라고 하기엔 너무 멍 때리는 시간이 많다. 정말 길게 샤워를 하게 되면 40분 정도 할 때도 있는데, 이 40분 중에 30분은 거의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고 서있는 시간이다. 지구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정신없이 샤워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40분이 지나가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그저 흘러간 물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며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곤 한다.


합법적으로 멍 때리는 시간

씻지도 않고 멍 때릴 거면 왜 샤워를 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맞다. 씻으려고 샤워를 하는 거라면 분명 씻고 빨리 나오는 게 시간도 절약하고 이치에도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난 사실 멍 때리려고 샤워를 한다. 그렇다. 나에게 샤워하는 시간은 일종의 '합법적인' 멍 때리는 시간이다. 평소엔 책 읽으랴, 공부하랴 멍 때릴 시간이 없다. 아니, 멍을 때리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샤워를 할 때는 그 누구도 나에게 멍 때린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다. 언뜻 보기엔 굉장히 청결한 사람처럼 보이니까.


몸도, 머릿속도 부드러워지는 시간

그렇다고 멍 때린다는 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는 것이라고 오해는 안 했으면 좋겠다. 30분 동안 멍하니 뜨거운 물줄기 가운데 서있는다는 건 누가 봐도 시간낭비니까. 물론 30분 중에 10분 정도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린다.' 하지만 나머지 시간 동안 난 생각을 한다. 진짜 하고 싶은 생각을 한다. 억지로 하는 영어, 스페인어, 상식 생각이 아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생각. 예를 들면, 지금으로부터 10년 뒤 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책을 쓴다면 어떤 책을 쓰고 싶은지, 영화를 제작하면 어떤 내용으로 만들 것인지에 대해 정말 '즐겁게' 생각한다. 뜨거운 물로 몸을 녹이다 보면 몸도 부드러워지고 머릿속도 부드러워진다. 이런 부드러워진 머리는 나도 신기할 정도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샤워를 하는 시간은 내게 뜻밖에 참신한 아이디어를 주기도 하고, 동시에 몸의 피로도 풀어주는 일종의 '힐링' 타임이다. 하루 동안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내 샤워시간. 글을 쓰다 보니 샤워를 또 하고 싶어 졌다. 비록 아침에 이미 했지만, 빨리 샤워하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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