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 인간이 가질 마지막 무기 - 주체적 사고
인간은 여타 동물과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두뇌와 직관, 지혜를 지녔습니다. 이러한 지혜는 인간이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사회를 구성하여 생태계의 정점에 서는 것을 가능케 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뇌는 에너지 효율을 최적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습니다. 이는 성인이 될수록 사고와 연산에 에너지를 덜 쓰게 만들며, 어릴 적 가지고 있던 본질을 보는 눈과 유연한 사고를 퇴화시킵니다. 그 결과, 대다수의 인간은 세상을 주체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소수의 ‘뛰어난 인간’들이 혜안과 통찰을 통해 문명을 혁신하고 이끌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 무엇이 달랐을까요? 저는 그 차이가 바로 **심관(深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4대 성인이라 불리는 이들이나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천재적인 경영자들은 대개 이 심관이 트여있는 사람들입니다.
심관이 트인 이들은 남들과 같은 것을 보고도 이면을 읽어내며, 오롯이 자신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바꿔나갑니다. 그렇다면 이 심관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기존의 통찰력, 주체적 사고, 창의력 등의 용어만으로는 심관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깊이 본다’는 뜻이며, 불교에서는 ‘현상의 이면을 알아채는 통찰력’ 혹은 ‘관측된 상황을 통해 인과와 원리를 파악하는 힘’을 의미합니다.
가장 쉽게 말하자면 귀납 연역 변증 같은 3대 추론 능력이 극대화 된 상태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종교적 깨달음의 영역이 아닌, 실전적이고 인지 역학적인 구조에 입각해 심관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 글은 그 능력을 기르기 위한 교본입니다.
저는 심관을 크게 세 단계, 즉 본립(本立), 범견(汎見), 원관(遠觀)으로 나눕니다.
본립(本立): 생각의 뼈대이자 근본을 바로 세움.
범견(汎見): 넓게 보며 세상을 대입함.
원관(遠觀): 멀리 꿰뚫어 보며 예측함.
이는 생각의 성장 과정이기도 합니다. 인지 역학적으로 인간은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 대상을 한정하고 배제함으로써 비로소 인지할 수 있으며, 모든 이해는 외부 대상을 자신 안에 대입하고 이입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세상을 '나'로 해석한다 할 수 있지요.
따라서 올바른 인지와 본질 파악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나를 이해하고 호불호(好不好)를 명확히 할 때,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 ‘나만의 기준’이 생깁니다. 이 기준을 토대로 세상을 해석하고 원리의 공통점을 찾아낼 때 비로소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획득된 객관성은 다시 자아성찰을 통해 나의 주관적 기준을 다듬어 줍니다. 다듬어진 주관성은 비록 나의 방식일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으로 재정립됩니다. 이 경지에 이르면 복잡한 연산 없이도 직관적이고 빠르게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통찰력입니다.
AI가 난립하는 현대 사회에서, 머신러닝이나 딥러닝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주체성’을 가진 심관의 가치는 과거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직업을 막론하고 심관을 깨우친 사람의 필요성은 흔들리지 않기에, 이는 현대인에게 필수적인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립(本立)은 자기 안에 생각과 판단의 뼈대를 세우는 과정이자, 진정한 주체성을 획득하는 단계입니다.
본립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직 ‘나’를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견딜 수 없는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은 결국 ‘나’라는 해석기를 통해 세상을 투영하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이 해석기에 오류와 편견이라는 노이즈가 끼어 있을수록 세상을 올바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모순과 장단점, 호불호를 명확히 하여 기준을 세우는 것은 사회적 요구나 권력자, 기득권의 사고방식에 종속되지 않고 내 생각의 주인이 되는 첫걸음입니다. 이 과정에서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취미나 특기를 찾는 것은 자신에게 ‘포기할 수 없는 가치’와 ‘포기할 수 있는 가치’를 구분하고, 삶의 우선순위를 정립하는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사회적 기준에 맞춰 막연히 ‘성공’이나 ‘부’를 쫓는 사람들은 자신의 근본이 내면이 아닌 외부에 있기에 결코 본립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반면, 본립의 과정을 거친 사람은 필연적으로 ‘나’라는 존재가 생물학적 개체에 국한되지 않고, 나와 관계 맺은 세상 전체로 확장됨을 깨닫게 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평소 ‘왜(Why)’, ‘어떻게(How)’, ‘무엇(What)’이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사고의 근본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질문이 익숙해지면 호불호를 찾고 취미를 찾고 깊이 빠져들 분야를 찾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만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통해서 규칙과 법칙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에 공통점과 분석의 기준을 세우는 연습이 자연스럽게 되는 것으로 공부, 훈련 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놀이’로 접근해야만 합니다.
인내심을 소모하는 노동이 아니라 성취감을 얻어내고 즐길 수 있는 놀이여야 포기하지 않고 본질에 도달하기 까지 포기하지 않고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잊지마세요 ‘놀이’야 말로 가장 훌륭한 ‘학습법’이자 ‘훈련법’이라는 사실을
범견(汎見)은 본립을 통해 세운 생각의 뼈대를 바탕으로, 세상의 수많은 현상을 대입하여 그 원리를 분해하고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이는 주관적 독선에 빠지지 않기 위한 ‘객관성 획득’의 과정이자, 사회적 존재로서 타인을 이해하고 사회성을 확립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사실 아이들은 대부분 심관이 트인 채로 태어납니다. 아이들의 동심이나 창의력은 자신의 기준(본립)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정보(범견)가 부족하여 객관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세상을 끼워 맞추다 보니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어른들은 성장 과정에서 주입식 교육과 사회적 권위에 짓눌려 본립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본립이 있어도 범견을 통해 객관성을 얻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망상에 빠지기 쉽습니다.
본립 단계에서 자신이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았다면, 범견을 성숙시키기에 최상의 조건이 갖춰진 셈입니다. 한 가지 분야에 깊이 몰입하여 얻은 이해와 사고의 뿌리를 다른 분야로 확장하고 응용할 때, 본질을 꿰뚫는 깊이가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사람은 타인을 이해하는 관용과 포용력을 기르게 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으며, 각자의 환경과 관계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노력 만능론’이나 ‘근성론’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자기편의적인 발상인지 이해하게 해 줍니다.
범견이 깊어질수록 감정에 휘둘리거나 사감을 개입시키는 일이 줄어들며, 주체적으로 환경을 구축하고 타인을 설득하는 능력이 탁월해집니다.
범견이 충분히 무르익게 되면 면접이나 미팅에서 상대방의 의도를 읽어내거나 상황을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 자연스럽고 어렵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짧은 시간 적은 정보를 통해서도 전체를 유추하기 쉬워지고 잘 모르는 분야도 핵심적인 기반 지식과 기전만 파악해 자유 자재로 응용하고 전문가와 대등하게 토론이 가능해집니다.
본립이 바로서면 범견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정보와 본질의 양이 본립하지 못했을 때에 비해 터무니없이 폭증하게 됩니다.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고 책을 보고 영화를 보고 게임을하고 음악을 듣는 모든 활동 모든 행동이 학습자료가 되므로 삶 그 자체를 통해 배우는 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실천하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일상과 사소함 속에서도 배움과 생각을 멈추지 않는 것이 일상화가 되어야
비로서 범견이 무르익었다 볼 수 있습니다.
심관의 세 단계는 순차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순환하며 발전하는 구조입니다. 본립으로 세상을 보고, 범견으로 넓히면 내면의 모순이 발견되어 다시 본립이 성숙해집니다. 이 순환이 반복되면서 원관(遠觀)이라 부르는 예측 능력이 발현됩니다.
원관은 원리와 인과를 이해함으로써 상황의 구성 요소와 작동 원리를 파악하고, 이를 통해 앞으로 벌어질 일을 유추하는 능력입니다. 이는 예지력 같은 초능력이 아니라, 정보의 인과관계를 파악하여 발생 가능한 위협을 미리 배제하고 대비하는 리스크 관리 능력에 가깝습니다.
원관이 활성화되면 수영이나 자전거 타기처럼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무의식 영역에서 직관적이고 빠르게 원인과 결과를 유추할 수 있게 됩니다. 외부에서 볼 때는 판단이 빠르고 지능이 높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수많은 변수 속에서 핵심 원리를 파악해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소프트웨어 최적화’가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원관의 가장 큰 특징은 ‘관점의 전환’이 자유롭다는 점입니다. ‘나’를 고정된 실체가 아닌 관계와 연속성 속의 ‘상태’로 인지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자신을 이입하거나 분리하여 객관적인 시뮬레이션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 유연성이 위기 관리와 문제 해결에서 탁월함을 발휘하게 합니다.
원관이 익숙해지면 단순한 사실 몇개나 아주 작은 단서에서 전체를 파악하기가 쉬워집니다.
상대회사의 메일 수신 속도를 보고 제정상태를 유추하거나, 메일에 표현한 문장의 뉘앙스를 통해 상대 회사 상황을 예측한다던지, 사람의 말보다 태도를 보고 상대 스스로도 인지 못한 진심을 캐치하기도 합니다.
말만 들어보면 무슨 초능력이야 할수도 있겠지만 규칙과 일관성 법칙을 깨닫는 것 자체가 사소한 행동의 규칙을 읽어내서 예측의 변수를 줄여나가며 보다 정밀한 예측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라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콜롬버스의 달걀처럼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한 발 먼저 틀을 벗어날 수 있는 그 힘은 현대사회에서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천재가 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드웨어(지능)는 그대로지만 운영체제(사고방식)가 최적화된 것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심관 없이도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이들이 많으므로, 우리는 그저 눈 감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운 좋게 먼저 눈을 뜬 사람일 뿐임을 기억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눈뜨고도 눈감은 사람만 못해지지 않으려면 항상 겸손하고 나태해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다스려야 할 것 입니다.
심관에 도달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판단을 내립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본립을 잃어버린 상태라는 점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이 우월하다고 느껴질 때, 타인의 행동이 답답하고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이때 타인을 돕고 안타까워하는 마음 대신, 얕잡아 보고 무시하는 마음이 든다면 당신의 심관은 온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나’는 관계를 포함하는 개념이기에, 타인의 미성숙함에 대해 자연스럽게 안타까움을 느껴야 정상입니다. 오만과 독선은 심관이 비틀리고 있다는 위험 신호입니다.
또한, 심관이 깊어질수록 타인에게 이해받기 어려워져 고독해질 수 있습니다.
직관적으로 깨달은 명제를 설명하기 위해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고, 본질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는 이치와 같습니다. 최대한 간결하고 직관적인 언어로 타인을 이해시키려는 노력만이 그 간극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범견을 게을리하면 AI 시대에 뒤처지게 되고, 본립을 위한 자아성찰을 멈추면 생각의 근육이 빠지게 됩니다. 심관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순환하고 성장해야 하는 과정입니다. 생각하기를 멈추거나 익숙한 방식에 안주하면 심관은 다시 닫히게 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본립, 범견, 원관이 통합되어 순환한다면, 당신은 감정적 동요 없이 어떤 조직에서도 필수적인 인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노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잊지 마세요
세상에 시간낭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어진 것을 활용할 줄 모르고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심관은 삶의 궤적의 다양성 많큼이나 다양한 형태로 발현될 것이고, 삶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실패로 단정짓고 주저앉지 말고 몇번이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길러나가는 것 그리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행복에 이르는 것이야 말로 심관을 익히는 의미입니다.
당신이 충분히 준비되었다면
심관은 자연스럽게 열릴 것입니다.
심관이 열리지 않았다고 비관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심관을 활용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