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트로 갬성 문화잡지 <PAPER>에 원고를 보내게 된 후 가장 괴로운 2주였다. 25주년 기념호 특집으로 은하계의 별만큼 많은 영화 중에 딱 4편만 고르라고요? 그것도 한 편 당 원고지 딱 네 장에? 'PAPER스러운 영화'가 얼마나 많은데? 할 얘기는 또 얼마나 더 많은데!? 이게 말이 되냐고요, 응? ㅋ
4편'만' 고르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수십 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영화 제목들을 길게 써놓고 나만의 이상형 월드컵을 골백 번도 넘게 했다. 어떤 영화가 가장 'PAPER스러운'걸까? 머리를 쥐어뜯어도 '정답'은 보이지 않았다. 영화를 20편쯤 다시 꺼내 봤다. 제대로 보지 않고 고른다는 건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제풀에 지쳐서 종내엔 '에라, 모르겠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로또 번호 고르듯 네 편의 영화를 골라 '찍었'다. 선택받지 못한 영화 목록들이 밤마다 꿈에 나타나 내 목을 조르며 아우성쳤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예비군 영화 원고를 네 편 더(합이 8편) 쓰기로 마음먹었다.
원고를 쓰는 건 고역이었다. 펜을 잡거나 키보드를 두드리는 대신 머리로 글을 썼다 지웠다. 지우고 쓰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다가 키보드 앞에 앉았다. 생각 뭉치가 실타래처럼 엉켜 쏟아졌다. 하고픈 얘기는 많아서 모든 원고 양이 넘쳐흘렀다. 읽고 또 읽어봐도 잘라낼 곳이 없어 보였다. 내가 싼 글 뭉치는 한 덩어리처럼 보였다. 마감을 쫓기 위해 빈속에 커피를 들이부었다. 어쭙잖은 글이 막히면 딴짓을 했다. 청소는 구원의 딴짓. 글 진도가 안 나가는 동안 각 잡힌 내 책상 바닥은 반짝반짝 윤이 났다.
파스칼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짧게 쓸 시간이 부족해서 길게 쓴다." 길게 쓰는 것보다 짧게 줄이는 게 어려워서 똥을 쌌(물론, 진짜로 싼 건 아니)다. 모니터를 노려보던 눈알이 빠질 것 같아서 한동안 원고를 쳐다도 안 봤다. 뚜껑 딴 콜라 김이 다 빠질 만큼 시간이 지난 후에 원고를 다시 보니 추접한 내 욕망처럼 사족이 덕지덕지 붙은 글 무더기가 보였다. 부끄러웠다. 모자란 내 글을 다시 보는 일이 이렇게 두려운 일인 줄 미처 몰랐다. 다 잘라 내도 아무 문제 없을, 쓸모없는 것들. 그것들이 (그제야) 눈에 보였다. 마지막 퇴고는 단박에 해치웠다. 살아남은 것들이 가슴 뿌듯하게 자랑스럽진 않았지만 더 잘라내면 의미가 무너졌을 테니까 어쩔 수 없이...
최종 4편에 들지 못한 영화의 이름을 호명해 본다.
미련과 아쉬움은 돌아 보면 사실 별것 아닌 것을.
그 사실을 다시금 깨우쳐 곱씹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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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스러운 영화' 4편 후보 (가나다순)
19번째 남자 (Bull Durham, 1988)
교실 안의 야크 (Lunana: A Yak in the Classroom, 2019)
네 번의 장례식과 한 번의 결혼식 (Four Weddings And A Funeral, 1994)
더 로드 (The Road, 2009)
더 빅 이어 (The Big Year, 2011)
더 포스트 (The Post, 2017)
런치박스 (The Lunchbox, 2013)
리틀 포레스트 (Little Forest: Four Seasons, 2017)
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 2011)
바베트의 만찬 (Babette's Feast, 1987)
붉은 거북 (La tortue rouge, The Red Turtle, 2016)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 1993)
술고래 (Barfly, 1987)
아메리칸셰프 (Chef , 2014)
어바웃 어 보이 (About A Boy, 2002)
우드스탁 : 사랑과 평화의 3일 (Woodstock, 1970)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2013)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일라이 (The Book Of Eli, 2010)
일일시호일 (日日是好日, Every Day a Good Day, 2018)
칠드런 오브 맨 (Children Of Men, 2006)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 (カメラを止めるな!, One Cut of the Dead, 2017)
콜롬버스 (Columbus, 2017)
파리로 가는 길 (Paris Can Wait, 2016)
해피 이벤트 (Un heureux evenement, A Happy Event, 2011)
행복한 라짜로 (Lazzaro felice, Happy as Lazzaro, 2018)
허니랜드 (Honeyland, 2019)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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