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내 시간 같은 시간이 생겼다. 시한부이긴 하지만 마음껏 즐겨야지. 어제는 조조 영화를 봤고 오늘은 오랜만인 친구를 만나 밥을 먹었다. 그 이유가 조금 슬프긴 했지만(탈모 때문에 어린 아들 앞에서 나이 들어 보일까 봐) 친구 K의 곱슬머리 펌은 제법 잘 어울렸다. 머리숱이 많아 골치 아픈 나는 배부른 소리는 그만하기로 하고 (속으로) '엄마 아버지 감사합니다!'를 3번 복창했다. 친구가, 내가 사는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 온 지 벌써 3년이나 되었다는 말에 서로 참 무심하게 살았다 싶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사는 얘기가 오갔다. 늙는다는 슬픔이 우리를 잠시 삼켰다가, 금세 잊혔다. 여행 얘기가 나왔다. 뉴욕에 가 보는 게 꿈이었다는 친구 K는 이내 숨통이 끊길 거라 엄포를 놓는 아시아나 마일리지를 긁어모아 뉴욕으로 날아가는 비즈니스 클래스 티켓 3장(자기, 아내, 아들)을 질렀노라고, 달뜬 얼굴로 말했다. 뉴욕 in, LA 아웃의 19박 20일 미국 여행. 친구는 한동안 자기가 꾸는 꿈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고 고백했다. 마일리지로 결제한 항공권을 제하고도 세 식구가 '뉴욕-워싱턴--라스베가스-샌프란시스코-하와이-LA' 일정으로 미 대륙을 횡단하는 여행 경비는 어림잡아 1,200만 원. 문제는 숙박비와 교통비였다. 더블침대 2개가 있는 저렴한 숙소 평균 가격이 20만 원, 미국 국내 항공권 평균이 1인 20만 원.
지금 벌이로 생활비 대기도 빠듯한 친구 K는 가족 여행 경비 마련을 위해 쿠팡, 마켓컬리 물류센터 야간 조에서 몇 달간 철야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지만, "정신 차려 인마, 뭘 또 그렇게까지..."라는 질책보다 "그래, 잘했네!" 하는 격려가 입 밖으로 먼저 튀어나왔다. 얼결에 뱉은 진심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친구의 계획을 응원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1인당 20만 원짜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도슨트 투어를 경험해 보겠니. 지금이 아니면 언제 식구 셋이 자전거를 빌려 센트럴파크를 하이킹하고, 라스베가스에 가서 쇼를 보겠니. 지금이 아니면 언제 금문교가 보이는 호텔에 묵고, 아들이 보고 싶다는 실리콘밸리의 애플 파크에 가 보겠니. 지금이 아니면 언제 뉴욕 양키스 홈구장을 둘러 보고, 하와이에 가서 훌라춤을 볼 수 있겠니. 소매치기 걱정, 야간 외출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반쯤 접어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둬. 지금이 아니면 언제 네가 꿈꾸던 여행을 떠날 수 있겠니. 그리고 친구야. (내부 공사 중이긴 했지만) 알량한 입장료 아끼겠다고 바르셀로나까지 가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안에 들어가 보지 않았던 나처럼 바보짓 하지 말고, 뉴욕 간 김에 빚을 내서라도 아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한다는 뮤지컬 <라이언 킹> 공연 꼭 보고 오렴. 살아 보니 '나중에'는 없더라. 네가 그랬잖아.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세 가지가 꼭 있어야 한다고. 시간, 돈, 같이 할 사람. 시간 있고 알토란처럼 같이 할 사람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한 번뿐인 인생, 걱정만 하다가 바로 지금 눈앞의 행복을 나중으로 미루는 바보는 되지 마.
사실은, 이거 다 너한테 하는 말이 아니고 내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야. 너는 이미 훌륭해. 몸을 굴려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그토록 꿈꾸던 가족 여행을 떠나는 너의 결기인지 도발인지가 너무 멋지거든. 출발 전까지 계획 잘 짜고 신나게 다녀와. 하와이에 도착하면 훌라 댄서가 훌라를 추는 그림엽서나 한 장 보내주렴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