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 3 - 롱 롱 타임
소문은 바이러스보다 빨리 퍼졌다. 2023년 올해의 드라마가 등장했다고(아니, 벌써?)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결정적인 건 <배철수의 음악캠프>. 매주 목요일 진행하는 '스쿨 오브 락' 꼭지 임진모 평론가가 하루 일찍 등장(?)한 이번 주 수요일에 역주행 히트곡을 소개하며 <더 라스트 오브 어스>를 언급한 것. 시즌 1 에피소드 3, 엔딩 곡으로 흘러나왔다는 린다 론스태드의 <Long Long Time>이 주된 화제였고, 에피소드 1의 엔딩곡이었다는 디페쉬 모드의 <Never Let Me Down Again>도 역주행 부활 곡으로 언급됐다. 대체 어떤 드라마이길래, OST에 삽입된 올드 팝(이런 표현 너무 슬프다. 모두 '내 시대'의 노래였다!) 곡들이 시간을 거슬러 차트 역주행을 하고 있는 걸까? 그것도 단지 시즌 1의 에피소드 6편만 공개됐을 뿐인데.
에피소드 3편까지 보고 나서야, 동명의 게임을 영화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미래의 스토리텔링 나와바리는 영화 대신 드라마나 게임이 접수하게 될 것(이미 그렇다)이라는 예언이 많더니... 게임엔 1도 관심 없고 무지한 나는 아무 선입견 없이 이 포스트 팬데믹 아포칼립스 드라마를 볼 수 있었다. 이야기는 20년 사이의 간극을 두고 2023년 현재와 2003년 특정 시점을 오가며 교차 진행된다. 일단, 스토리 전개 속도가 빨라 좋았다. 군더더기 없이 압축된 이야기의 속도감이 에피소드 2개를 훌떡 먹어치운다. 역시, 좀비(요즘 트렌드?)가 나온다. 팬데믹의 원인은 동충하초 같은 곰팡이류. 바이러스일 거라 짐작했는데 조금 신선(or 신박)했다. 멸종과 혼돈 사이에서 권력을 쥔 에코파시즘(ecofascism) 단체 '페드라'가 등장하고 그에 맞서는 자유주의 테러 단체 '파이어플라이'도 있다. 시즌 1 초반 전개는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의 스토리를 유사하게 답습한다.
사연이 있는 남자가 '피치 못하게' 좀비가 우글거리는 '무방비 도시'에서 온갖 위험을 뚫고 사연이 있는 어린 소녀를 어딘가로 데려가야 한다. 유사 장르물의 클리셰가 지뢰처럼 도처에 깔려 있다. 감염과 반란을 막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기시감을 떠올리게 하는 페드라의 만행, 인류애와 자유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치료제/백신 개발을 위해 폭력으로 저항하는 파이어플라이의 분투, 유사 부녀지간으로 묶인 두 인물의 2인 3각 달리기 같은 위험천만한 동행. 그런데...
부비트랩처럼 예상치 못한 사랑 이야기를 만나 망치로 머리통을 크게 한 대 얻어맞았다. 에피소드 3의 제목은 'Long Long Time'. 빌과 프랭크의 이야기다. 빌과 프랭크는 보스턴 외곽의 시골 마을에서 살고 있다. 그들의 삶은 보스턴 구역 안에 고립된 다른 이들의 생존과 다르다. 제대로 된 음식과 꽃과 주거환경이 보장된 문명의 삶이다. 빌과 프랭크는 고립된 도시 간 라디오 주파수 교신을 통해 주인공 조엘(페드로 파스칼)과 자원을 물물교환하는 사업 파트너 관계를 맺는다. 라디오 교신 암호는 빌보드 차트를 수놓았던 왕년의 히트곡들. 60년대 노래는 '새 물건이 없다', 70년대 노래는 '새로운 물건이 있다', 80년대 노래는 '문제가 생겼다'는 암호. 조엘이 잠든 사이 라디오로 전송된 신호 하나를 놓친다. Wham의 1984년 히트곡 <Wake me up! before you go-go>의 가사를, 망가진 세상에서 태어나 Wham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소녀 엘리(벨라 램지)가 듣고 흥얼거리는 식으로 연출해, 빈티지에 열광하는 밀레니엄 세대의 호기심과 아름다웠던 지난 시절에 관한 기성세대의 그리움을 동시에 자극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좀비 시대에도 사랑은 싹튼다. 예상 못 한 지점에서 훅! 치고 들어오는 털보 아저씨 둘(빌과 프랭크)의 사랑 이야기는 린다 론스태드의 <Long Long Time>으로 시작해서 <Long Long Time>으로 끝난다. 때아닌 <Long Long Time>의 차트 역주행 신드롬은 이 두 털보 아저씨의 순도 120% 로맨스 덕분임에 틀림없을 터. 지독히 냉소적이고 현실적인 서버이벌리스트(생존 전문가) 빌(닉 오퍼맨)과 거짓말 못하고 무턱대고 사람을 믿는 낭만주의자 프랭크(머레이 바틀렛)의 어울리지 않는 사랑은, 그러나 전혀 이물감이 없다. 그것이 전쟁이나 경쟁이나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이다. 물론, 20년 가까운 드라마 타임 속의 그들 사랑이 리얼 타임 몇십 분 만에 진짜처럼 보이는 것은(웃기지 말라고요? 일단 보시라니까요! 털북숭이 아저씨들 사랑 이야기에 몰입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라니까요?) 오롯이 배우들의 사실적인 연기와 섬세한 연출 덕분일 것이다. 아!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린다 론스태드가 부른 <Long Long Time>이 비현실적 로맨스를 더 절절하게 만드는 데 한몫 단단히 한 것도 있다.
그렇지만, 이상한 공감대가 만들어지고 감정이입하게 되는 킬링 포인트는 앞서 말한 표면적 이유들 밑바닥에 숨어있다. 누군가를 갈망하는 인간의 외로움이 생존 욕구를 앞선다는 것. 인간은 사회적 동물(혼자 살 수 없다)이라는 것. 생존만으로 채울 수 없는 형이상학적 욕구(사랑 어린 섹스 포함)가 인간 존재의 중요 요소라는 것. 인간도 동물이지만, 인간이 동물과 달라지는,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시대에도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 그럴수록 사랑은 빛처럼 또렷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 사랑을 베풀고 갈망해야 한다는 것. 에피소드 3 'Long Long Time'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뻔한 이야기들을 뻔한 듯 뻔하지 않게 보여준다. 사랑이 의미 없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오히려 소멸해버린 것 같은 사랑과 희망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것들이 빛을 낸다는 역설. 덕분에 오랜만에 무언가에 제대로 푹 빠졌고, 에피소드 3편밖에 안 본 이 드라마의 다음 회차를 엄청나게 기대하게 됐다.
아! 약간의 부작용도 있다. 이 털보 아저씨 둘의 이십여 년 사랑을 1시간 남짓의 리얼타임 동안 압축해서 대리 체험하는 내내, 질질 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그래서 갑자기 어린이집에서 열심히 근무하고 있을 마누라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엉엉 울게 만들었다는 것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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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ong long time -Linda Ronstadt
2) Depeche Mode - Never Let Me Down Again
3) Wham! - Wake Me Up Before You Go-Go
https://www.youtube.com/watch?v=A8EHE_J3gc4
https://www.youtube.com/watch?v=snILjFUkk_A
https://www.youtube.com/watch?v=pIgZ7gMze7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