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걸어도 걸어도 (歩いても 歩いても)>
어른들 몰래 금지곡 모음 테이프를 돌려 듣던 시절이 있었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이불을 뒤집어쓴 채 노래를 들었다. Nolans의 <Sexy Music>, Paul Revere & The Raiders의 <Indian Reservation>, 다음 곡이 이시다 아유미의 <Blue Light Yokohama>였다. 어린 나는 가사의 뜻도 모른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마다 이국(異國)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 노래 때문에 여드름투성이 소년에겐 푸른 불빛에 흔들리는 요코하마 항구의 밤거리를 걷고 싶다는 소원까지 생겼지만(2016년에 드디어 그 꿈을 이루었다), '아루잇떼모, 아루잇떼모'가 '걸어도 걸어도'라는 의미였다는 걸 알게 된 건 뜻하지 않게 '어른'이 되고 난 후였다.
<걸어도 걸어도>(2008)를 볼 때였다. 영화 속에서 어떤 아줌마가 사연 가득한 눈빛을 하고 능청스럽게 그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는 게 아닌가. <도쿄 타워>(2007)에서 '오다기리 죠의 엄마'로 처음 만난 키키 키린이었다. 사고로 요절한 장남의 제삿날,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인 자리, 밥상머리의 어색한 침묵을 깨려고 둘째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두 사람만의 추억의 노래가 있냐'고 묻는다. 밥을 먹다 말고 시어머니 토시코(키키 키린)는 오래된 레코드(LP)를 들고 와서 튼다. 수십 년 전, 바람난 남편을 찾아간 요코하마 내연녀의 아파트에서 <Blue Light Yokohama>를 부르던 남편의 목소리를 듣다가 차마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 길로 돌아와 역 앞 레코드 가게에서 산 LP였다. 오랜 세월 가슴에 꾹꾹 눌러 두었던 그 얘기를, 곪고 덧나서 시간도 아물게 하지 못한 그 상처를, 이 노련한 배우는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져놓는다. 여자는 무섭다는 걸, 아니, 사람은 무서운 존재라는 걸 면도날처럼 서늘하게 알려준 배우, ‘걸어도 걸어도’를 부르며 '다테마에'(建前, 겉표현)와 '혼네'(本音, 속마음)의 간극을 절묘하게 표현하던 키키 키린이 죽었다. 향년 75세.
그녀의 본명은 우치다 게이코. '유우키 지오'란 예명으로 활동하다가 스타 애장품 경매 프로그램에 물건 대신 이름을 내다 팔고는 다시 지은 이름이 키키 키린이다. '나무와 나무, 숲을 꿈꾸다'라는 뜻이란다. <내 어머니의 인생>(2011), <앙 : 단팥 인생 이야기>(2015), <태풍이 지나가고>(2016) 등 대표작에서 보여준 연기 모두가 유방암과 싸우며 만들어 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또 한 번 놀랐다. 그녀는 배우가 아니라 영화 그 자체다. 키키 키린의 얼굴에는 인생의 희극과 비극이 빛과 그림자처럼 한데 엉켜있다. 무엇보다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내 할머니와 내 엄마의 얼굴을 본다. 뻔한 엄마 캐릭터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남몰래 숨어서 듣는 노래가 하나쯤 있지'라고 말하는, '엄마'가 아닌 '여자'의 얼굴 말이다.
아버지와 다툰 날이면 엄마는 안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소리 죽여 울곤 했다. 엄마 역시, 아버지가 새까맣게 잊어버린 오래전 일들을 절대 잊지 않았다. 화가 나면 엄마는, 사소한 말다툼 끝에 아버지가 밥상을 엎었던 신혼 시절 얘기를 꺼내 들곤 했다. 서툴게 엄마를 달래는 어린 아들 앞에서 소싯적 연인이었던 공군 장교 얘기를 꺼낸 적도 있었다. "그때, 눈 딱 감고 그 남자와 결혼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내가 이런 꼴 안 보고 살 텐데..." 엄마가 아련한 눈빛으로 부잣집 아들에 잘생기기까지 했던 공군 장교 얘기를 꺼냈을 때, 엄마가 낯설게 보였다. 엄마가,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 같았다. 엄마는 아버지를 '바다보다 더 깊이' 사랑했을까? 엄마가 죽고 몇 주 동안 유품을 정리할 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장롱 깊숙이 숨겨 두었을지 모를 엄마의 연애편지를 찾아보기도 했다. 엄마가 아닌 '여자 박순자'의 인생은, 언제 것인지도 모르고, 무엇인지도 모른 채, 까만 비닐봉지에 싸여 냉장고 깊숙이 처박힌 잡동사니들처럼 꺼내도 꺼내도 끝이 없을 터였다. 그러다 달달한 비밀 연애편지 대신 비닐봉지에 둘둘 말아 놓은 돈뭉치를 찾았다. 맛있는 것 사 먹거나 옷 사 입으라고 내가 준 용돈이었다. 돈뭉치 안에는 메모지가 있었다. 삐뚤빼뚤 쓴 글씨로 '199X년 X월 00일, 아들이 10만 원'같은 메모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나는, 엄마가 꼬깃꼬깃 모아 놓은 지폐 뭉치와 메모지를 붙들고 소리 내어 한참을 울었다.
엄마를 만나러 산소에 갈 때마다 나비를 찾는 버릇이 생긴 것도 키키 키린 덕분이다. 날 맑은 날, 무덤가에 노랑나비가 한 마리 날아와 팔랑거리면 엄마가 온 거라 생각했다. 죽은 아들 준페이가 찾아온 거라며 제삿날 집에 날아든 나비를 반기는 엄마 토시코 씨의 마음이 엄마를 그리워하는 내 속에 그렇게 녹아들었다. 아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정성을 다해 시루에 떡을 찌고, 식혜와 수정과를 만들던 엄마는, 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으로 단팥을 만들던 <앙 : 단팥 인생 이야기> 속 도쿠에 할머니를 닮았다. 영화의 이야기가 스크린 밖으로 나와 내 삶 안에 녹아든 것은 순전히 키키 키린의 마음을 담은 연기 덕분이다. 그녀의 연기는 입으로 쌀을 씹어서 오랜 시간 발효시켜 만든 술, 구치카미자케(口噛み酒)처럼 곰삭은 맛이 있다. 그녀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영화 안에서 숨 쉬며 살아남아 누군가의 할머니나 엄마가 되어 줄 것이다. 그런 믿음으로 그녀가 연기한 영화의 대사로 추도사를 대신한다.
"행복이라는 건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받을 수 없는 거란다. 난 평생 누군가를 바다보다 더 깊이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거야, 날마다 즐겁게."
(<태풍이 지나가고> 中 어머니 요시코가 아들 료타에게)
* 뱀발 : 엄마! 그곳에서 키키 키린 여사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친하게 지내. 아들이, 당신의 연기와 영화를 몹시 좋아한다는 말 꼭 전해 주고.
by 타자 치는 스누피
(<PAPER> 2018년 겨울호 '맨발의 영화'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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