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유서 깊은 출판사 '갈리마르'는 100년 넘게 같은 포맷의 표지를 선보이고 있다. 변화를 외면하는 아집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고, 변화가 생존의 조건이 된 시대에도 변치 않는 가치를 지키려는 신념에 열광하는 골수팬들의 지지를 받기도 한다. 세상 물정 모르는 고집 때문에 갈리마르 출판사가 100년을 버텨낸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음'의 자세를 유지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변화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현대차 '포니 쿠페' 1세대 모델을 떠올려 보자. 2020년 서울 거리에 조르제토 쥬지아로의 앤티크 한 디자인의 1975년産 포니 자동차가 굴러다닌다면 단박에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것이다. 시간은 변치 않는 것에 새로움의 가치를 덧입히기도 한다. 1975년에는 익숙했던 디자인이 2020년에는 낯선 것, 새로운 것으로 재정립된다.
<PAPER>도 한때는 피가 펄펄 끓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덧 스무 살이 되었다. 두 세대의 강을 건너며 파릇했던 잡지가 머리가 허예진 셈이다. 피는 여전히 붉게 흐르고 있지만 함께 어깨를 견줬던 동년배 잡지들은 종이로 만든 납골당에 봉헌된 지 오래다. 부침을 겪으며 <PAPER>는 살아남았다. 살아남기 위해 <PAPER>도 물론 변했다. 월간에서 계간으로, 판형부터 필진까지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러나 창간호부터 오늘날까지 20년 넘는 시간 동안 <PAPER>가 부둥켜안고 온 문화 잡지의 본질, 종이 출판물의 본성, '좋은 잡지는 구독자와 함께 나이를 먹는다'라는 기본 가치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는 변한 게 별로 없는 셈이다. 대신 세상이 변했고 다른 것들이 변했다. 잡지 출판 생태계, 사회 공동체의 문화와 가치가 변하다 보니 늘 같은 자리를 지킨 <PAPER>가 외려 '별난 잡지'가 되어버린 것 같아 감회가 새롭다.
달은 그대로인데 보는 이의 관점, 시간, 위치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레트로(고물)'와 '뉴트로(보물)'는 음절 한 끗 차이로 다른 의미가 되고 '빈티지(구닥다리)'에 점 하나(새로운 관점과 해석)를 찍으면 '아방가르드(전위)'로 변신하기도 한다. 변화무쌍한 때일수록 속도보다는 방향이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지금까지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달려온 <PAPER>의 20년이 있었다면, 앞으로의 20년은 숨을 고르고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걷는 산책자의 혜안을 갖게 되기를, <PAPER>가 '지금, 여기, 나'가 아니라 '미래, 저기, 우리'를 꿈꾸는 사유의 유랑자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 PAPER의 오랜 독자였고, 잠시 필자였으며, 영원히 친구로 남을 스누피 올림.
#PAPER #PAPER2020년가을호발간을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