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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디이 Dec 29. 2023

남몰래, 뉴욕에서 산타가 되어 본 소감

미국 동부 뉴스 (1)

 "누구 올해 시크릿 산타하고 싶은 사람 있어?"


직장 동료가 보내온 이메일


연말에만 느낄 수 있는 들썩이는 들뜸이 내 몸을 간지럽혔다.


    원래대로라면 지극히 평범한 평일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나를 포함해 다들 아침부터 분주했다. 모두가 점심시간을 기대하며 들떠있었다. 12월 20일 오늘, 시크릿 산타 스케빈저 헌트 (Secret Santa scavenger hunt: 비밀 산타 선물 찾기 게임- 이름 한번 거창하다)를 하기로 한 날이다. 모두가 평소와 달리 수상쩍었다. 출근하는 길은 역시나 피곤했지만, 오피스에 도착하자 어느새 기대감과 함께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스케빈저 헌트를 하기로 한 날, 브레이크 룸에는 아침부터 이미 첫 번째 단서를 주기 위한 쪽지들이 놓여있었다.

나는 항상 아침에 조금 일찍 도착하는 편인데, 다른 동료가 어디로 향하는지 복도를 달려가는 것을 보기도 했다. 이른 점심을 먹으려고 도시락을 들고 내 오피스에 들어서자 직장 동료가 눈을 가리는 손짓과 함께 "Close your eyes"라며 급히 공용 물품 사물함에 무언가를 숨겼다. 그 동료는 오늘 마주치는 누구든지 자신에게 "여기 있으면 안 돼"라며 자기를 쫓아냈다며 웃었다. 이 비밀스러운 산타 이벤트는 한 달 전, 내가 받은 이메일로부터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대한 기대감이 생길 무렵인 11월이었다 (참고로 미국은 9월부터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준비한다). 의외의 인물로부터 개인 이메일을 받았다. 나와 동갑내기인 벨기에 출신 직장동료였다. 매우 활발한 성격의 친구라 오며 가며 인사하고 밥 먹을 때 이야기도 하지만, 나랑 가까운 사이는 아니어서 발신자를 보자마자 의외였다. 알고 보니, 연구실 사람들 전원에게 함께 '시크릿 산타 (Secret santa)'를 할 사람을 모집한 것이었다. 참여하는 개개인 모두가 1:1로 랜덤 매칭되어 누군가의 비밀 산타가 되어주는 것이 이 게임의 핵심이다. 제비 뽑기로 각자 본인이 "산타"가 되어줄 대상을 뽑고 서로 비밀 선물을 해주는 크리스마스 문화인 것이다. 상대방이 내가 선물을 해주는 사실을 몰라야 한다는 점에서 한국에서 종종 하는 마니토와 같다. 시크릿 산타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아서 흥미가 생겼다. "I'm in!" 무조건 한다고 했다.


참여할 사람들이 정해지자 각자 누구에서 선물을 줄 것인지 정하기 위해 랜덤으로 이름을 뽑았다. 이름 뽑기 상자에서 나는 '꽝'을 뽑았다. 정확히는 종이에 우리 팀 중에서 내가 한 번도 말을 해보지 않고, 전혀 교류도 친분도 없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김이 새는 순간이었다. 내심 내가 친해지고 싶거나 호감이 가는 동료를 뽑고 싶었던 터였다. 선물도 해주고 이 기회에 더 친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소에 내가 관심도 없었던 그리고 오히려 인사도 잘하지 않아서 좀 별로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뽑은 것이다. 그날 저녁, 몇 분의 고민도 하지 않고 선물을 아마존에서 구매했다. 취향도 성격도 모르는 사람이라서 수염을 기르는 그 동료가 실용적으로 잘 쓸 수 있을 것 같은 버츠비 남성용 그루밍 세트를 구입했다. 시크릿 산타는 선물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대상자에게 모르게 선물을 하는 것이 룰인데, 내가 그 동료의 시크릿 산타라는 것은 전혀 모를 것 같았다.




연말 + 보물찾기 + 수수께끼 = 크리스마스 스케빈저 헌트


    일주일쯤 뒤, 시크릿 산타를 주최한 벨기에 직장 동료는 룰을 하나 더 추가했다. 스케빈저 헌트 (Scavenger Hunt: 보물 찾기의 일종)를 곁들이기로 한 것이다. 스케빈저 헌트는 한국의 보물 찾기와 같고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임이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스케빈저 헌트는 조금의 재미가 더해진다. 보물 찾기처럼 단순히 보물을 숨겨두고 찾는 것이 아니다. 선물을 쉽게 주지 않는다. 수수께끼와 같은 클루 (Clue: 퀴즈나 단서)를 쪽지로 받고 쪽지에 적힌 문제를 풀어야 한다. 주로 다음 쪽지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단서를 주고 이어서 몇 개의 쪽지들을 순서대로 찾게 한다. 마지막 힌트에 도달하고 나서야 선물이 숨겨진 장소를 알 수 있다. 처음엔 어떻게 퀴즈를 만들고 단서를 주지 아리송했지만, 구글링으로 예시를 찾아보자 갑자기 확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11:35 AM 평소 같으면 브레이크 룸에서 이른 점심을 편하게 먹고 있을 시간인데 오늘은 시크릿 산타 쪽지 박스가 있어서 내 자리에서 먹기로 한다. 12시부터 시작될 시크릿 산타가 벌써부터 신경 쓰인다.


해리포터를 모티프로 한 크리스마스 스케빈저 헌트 예시를 읽으니 상상력이 자극되었다



한번 하면 제대로 하는 성격인 나는 갑자기 불타올랐다.


나의 흥미를 완전히 자극한 것은 바로 내 선물로 상대방을 인도하기 위한 수수께끼가 적힌 쪽지 만들기였다. 직장동료의 스케빈저 헌트 프로토콜 예시 이메일이 내가 무언가 재미있는 이벤트에 초대되었다는 느낌을 들게 했다. 해리포터를 이용한 설명문이 나를 제대로 낚은 것이다. 해리포터를 좋아하는 나에게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오르며, 내가 해리포터나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 속 캐릭터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배경은 지극히 일상적인 사무실이었지만, 이 크리스마스 스케빈저 헌트는 나에게 미스터리하고 신비스러운 이벤트로 승격된 것이다. 귓가에는 Nutcracker (호두까기 인형)의 테마송이 울려 퍼지는 듯했다.


스케빈저 헌트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예시를 찾기 시작했다. 금세 크리스마스용 스케빈저 헌트 클루를 위한 재미있는 수수께끼나 라임이 맞춰진 문구들을 찾을 수 있었다. 주로 반지의 제왕에 나올 법한 옛날 말투 (You shall ~) 나 알듯 말듯한 아리송한 단서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게 특징이다. 나만의 클루를 만들어보며 점점 연말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맞는 폰트들로 프린트한 클루들과 크래프트지로 포장한 선물


스캐빈저 헌트의 클루들은 재미있는 라임이나 상징, 말장난을 활용한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상상이나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문구로 시작하면 된다. 내 첫 번째 클루는 이렇게 시작했다. "크리스마스는 너의 생각보다 빨리 오고, 그렇게 멀리 볼 (기다릴) 필요는 없어." 크리스마스에 대한 문구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크리스마스가 '빨리' 오기 때문에 너무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와 함께 두 번째 쪽지가 있는 장소가 일하는 사무실 근처라는 단서를 주기 위해 'don't have to look far'이라는 중의적 표현을 사용했다.


나 스스로 마음에 들었던 문구는 "두 개의 문들 중에 유령이라기보단 검정과 주황색을 가진 집에 속한 게이트 (문)으로 들어가. 그 문 뒤를 확인해." 이때 "the gate of black and orange house"라는 표현은 내가 첫 번째 클루를 숨겨두기로 한 사무실에 붙어있는 그림을 묘사한 것이다. 유령이 생각나지만 사실은 집 모양인 점에 착안해서 "rather than ghost"를 덧붙였다.


원래는 딱 이 힌트만 주려고 했는데 너무 어려울까 봐 선물을 받을 동료가 일하는 공간이라는 표현과 함께 그 방에는 두 개의 문이 있기 때문에 "among two doors"라는 표현을 추가했다. 원래는 더 어렵게 만들려고 했었는데, 동료들이 쉽게 풀 수 있게 만들 거라고 해서 난이도 조정을 했다. 크리스마스 스케빈저 헌트 전 날 다른 이들과 이야기했을 때 다들 분명 별로 어렵게 안 할 거라며 자기는 클루를 2개밖에 안 만들었다며 귀찮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스케빈저 헌트를 시작하고 보니, 다들 엄청나게 심혈을 기울여서 클루를 어렵게 만들고 심어두었다. 어떤 동료는 중학교 때 풀법한 3차 방정식을 이용한 동물들 다리 개수 맞추기와 같은 수학 문제를 내기도 했다.




PM12:00 쪽지가 쓰인 종이들 사이에서 모두가 가져가고 남은 큰 종이 접기가 나를 위한 첫 번째 클루였다.


생각보다 어려운 단서들에 열심히 토의하며 다음 쪽지를 찾아나가는 동료들. 집단 지성이 필요했다. 산타 모자를 쓴 사람 (오)가 크리스마스 스케빈저 헌트의 주최자.



    내가 받은 첫 번째 클루는 딱 실험하는 사람들이 냈을 법한 것이었다. "밴드들이 빛으로 인도되고, 젤들이 단백질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에서 시작하라 (Begin where images of bands are broght to light, where gels tell stories of proteins)."  

첫 번째 클루 (오)에서 "bands"는 단백질 실험 결과 (왼, ©BIO-RAD)의 가로 선을 뜻한다. 프로틴의 성분에 따라서 저 검은색 가로선들의 위치나 진하기가 달라진다.


나는 실험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실험 용어는 알아도 정확히 무슨 기계가 해당되는 실험을 하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내 시크릿 산타는 실험하는 사람이었는지 모든 클루들이 다 내가 평소에 가지도 않는 티슈 컬처 룸 (Tissue culture room)이나 실험 도구들이나 벤치들 근처에 있었다. 특히 티슈 컬처 룸은 기본적으로 무균 상태를 유지해야 하기에 뭔가를 무작정 뒤져보기도 내키지 않았다. 두 번째 클루에는 현미경을 의미하는 "where discoveries are seen"이라는 문구가 있어서 모든 현미경들을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어디가 열리는지도 모르겠는데, 괜히 만졌다가 엄청나게 비싼 실험 기계들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에 실험하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서 단서를 풀어나갔다.


모든 클루들이 다 실험 관련 기계 안에 들어있거나 그 위에 숨겨져 있어서 난감했다. 몇 번이나 체크했지만 만져볼 생각도 안 했던 현미경 위에 검정 상자 속에 놓여있던 클루 (오)



 오랜만에 소속감을 느꼈다.


    하나씩 클루를 찾아가면서 사람들과 의논하고 함께 뭔가를 찾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스케빈저 헌트 날 이전에도, 평소보다 동료들과 괜히 이런저런 말을 더 하기도 하고 상대가 누구의 시크릿 산타인지를 맞추려는 재밌는 말도 더 건네기도 했다.


게다가 내가 뽑고 나서 '꽝'이라고 생각했던 이름이 사실은 그 동료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스케빈저 헌트를 하면서 내가 선물을 준비한 동료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도 하게 되고 심지어 나중에는 내 두 번째 클루를 찾는데 그 동료가 도움을 주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본인의 시크릿 산타인 걸 눈치채서였을지도 모르지만, 완전한 무관심에서 서로 클루를 이야기하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제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 동료는 평소 일만 하고 조용할 뿐이지 나름 유쾌한 사람이었다. 거의 3개월 동안은 말을 한마디도 안 하고 인사도 안 했는데, 이벤트 하나로 웃고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니 나도 마음이 편해졌다. 평소에 인사도 잘 받아주지 않아서 '나를 싫어하나'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게다가 내가 시크릿 산타였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엔 좋은 브랜드 제품을 선물해 줘서 고맙다며 인사하는 모습에 선물하기 귀찮아했던 과거의 내 감정이 조금 미안하기도 했고 좋아하는 모습에 뿌듯하기도 했다.


원래는 직장 관련 이벤트나 행사에 가는 것을 상당히 귀찮아하는 편이었지만, 역시 뭔가를 시도해 보면 그에 따라 재밌는 일들이 생기고 새로운 인연도 만날 수 있다. 작년에도 직장에서 연구팀들을 대상으로 한 화이트 엘리펀트 이벤트에 참여했었고 미국인들이 선물을 가지고 진심으로 유쾌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며 문화를 더 이해하게 되었었다 (아래 해당 글을 링크해 두었다). 누가 준비해 준 이벤트가 아니라 내가 뭔가를 주최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기쁨과 재미를 주는 이벤트를 기획해 보아야겠다.




함께 읽으면 재밌는 글

https://brunch.co.kr/@nerdie109th/32

https://brunch.co.kr/brunchbook/mmmus



시크릿 산타가 되는 길은 험난해 보이지만 무척이나 즐겁다


참고문헌


https://www.bio-rad.com/en-us/applications-technologies/western-blot-doctor-protein-band-appearance-problems?ID=MIW4Q8C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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