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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널드 Apr 07. 2019

저는 제2외국어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제2외국어가 저를 선택했습니다

재외국민들이 다니는 중국국제학교로 교생 실습을 갔었다. 분명 외국에서 해야 하는 한 달 살기였지만, 교생 실습 기간엔 내가 외국에 있다는 느낌을 거의 받지 못했다. 연변에 갔을 때엔 심지어 마음이 더욱 편안해지기까지 했다. 조선족자치구의 법령에 따라 중국어 간판에 반드시 한글을 병기해야 했는데, 언어의 이질감이 완전히 사라진 그곳은 내게 더 이상 외국이 아니었다.

전혀 이국적이지 않은 연변역(2017.05)

하지만 그런 중국에서도 갑자기 외국임이 턱 느껴질 때가 있었다. 중국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사려고 하는데 점원이 중국어로 이야기를 했다. 예정에 없던 중국어 대화에 당황했는데, 나를 더 당황시킨 것은 따로 있었다. 내 뇌는 여태껏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위급 상황에서 영어를 꺼내면 만사 오케이라는 알고리즘을 장착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처음으로 통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점원에게 I'm sorry나 pardon을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긴장감이 엄습했다. 그곳은 더 이상 외국이 아니었다. 외계였다.


이처럼 외국에 온 것 같은 느낌,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음식도, 사방을 둘러싼 외국인도, 이국적인 풍경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국적인 느낌의 근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약간의 긴장감'을 수반한다. 음식이 아무리 이국적이라도, 아무리 주변에 외국인이 많아도, 처음 보는 열대 식물로 둘러싸여 있어도, 내 주변에 한글이 보이고 들린다면 이국적인 느낌은 완성될 수 없다.

이런 비주얼의 양고기도 한인 선생님들과 함께한다면 중국 선양이 아닌 서울 대림동이 된다(2017.05)

따라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은 내가 가질 수 있는 이국적인 느낌이라는 7111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줄이는 일이다(언어 통계 전문 사이트 Ethnologue 참조). 거기서 조금 더 살을 붙여 의미를 확장시키자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은 내 고향을 늘리는 일과 같은 셈이다. 그러니 내가 전 세계 인구 중 200만 명 정도밖에 쓰지 않는 루소가를 배우는 일이야 말로, 이곳에 대한 이국적인 느낌을 없애고 또 다른 고향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다. 

이 사람들이 한국말을 모두 다 잘한다면 과연 이국적이라는 느낌이 들까(2019.02)

'영어는 기본, 제2외국어는 옵션'이 기본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서, 대부분이 제2외국어를 어떤 언어로 선택하는지에 대한 기준은 언어 사용 인구에 있는 것 같다. 많이 쓰일 것 같은 언어, 나중에 도움이 될 언어로 제2외국어를 결정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당연한 결정이다. 이렇게 서두가 길었던 이유는 나의 제2외국어는 어찌 보면 몹시 비합리적이고 나중에 대단히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으며, 사실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음 이건 이국적인 게 아니라 다만 익숙하지 않은 풍경(2019.02)

제2외국어는 당연히 앞으로 도움될 것 같은 언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정작 앞으로 대단히 쓸모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아프리카 어딘가의 언어를 배우는 게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우간다는 아프리카 국가 중 평균적으로 대부분이 영어를 잘하는 편에 속한다. 그러니 이곳에 온 외국인들이 굳이 현지어인 루소가를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있는 지역인 진자는 우간다에서 유명한 관광 명소로 외국인들이 굉장히 많이 모여있는 지역 중 하나인데, 이곳 외국인이 루소가를 쓰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러니 허접한 루소가로도 이들은 있는 힘껏 환대해준다. 내가 학생들과 이야기하다가,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헬스장에서 운동할 때, 루소가 몇 마디만 해도 몹시 반가워한다.

고향이 고향인 이유는 내가 그것을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제2외국어인 루소가 역시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곳이 또 다른 고향처럼 느껴진다는 말이 그렇게 허투루 느껴지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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