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내 이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Mar 04. 2018

인생은 아름다워? 응 지금은 아니야

나 자신을 속이지 않기로 했다

  퇴근길에 들른 마트에서 아이스크림 한 통을 사 왔다. 냉동실 문을 여는데 이미 사놓고 포장도 뜯지 않은 아이스크림 세 통이 나를 반긴다. 바닐라, 초코, 녹차에 오늘 사 온 밀크티까지. 당장 먹지도 않을 아이스크림을 이렇게 채워두는 취미가 언제부터 생긴 거지. 생각해보니 마지막 아이스크림 사재기는 1년 전, 이전 직장에서 한창 스트레스받을 때 생겼다 퇴사와 함께 사라진 버릇이다.


  요즘 밤이면 잠을 못 자고 아침이면 침대 밖을 나오는 게 힘들다. 여드름이 생겨나고 식욕이 사라졌다. 카페인 과다복용? 비타민 부족? 미세먼지? 그런 게 이유였다면 '요즘'이라는 말을 붙일 수도 없을 거다. 애써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아예 경우의 수로 두지도 않았는데 답은 이것 같다.


나는 지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이 답을 찾기 위해 나는 두 가지 거짓말을 내팽개쳐야 했다.




첫 번째 거짓말, "나는 스트레스 잘 안 받는 사람이야."


출처=빨간머리 앤 애니메이션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빨간머리 앤은 지금도 내 롤 모델이다. 긍정적인 태도로 스트레스를 떨쳐내는 강인함을 닮고 싶어서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세상에 많은데 그런 것들 때문에 스트레스받으면 내 손해잖아.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적으로 해결책을 찾아가는 나. 어찌할 방법이 없을 땐 어깨 한 번 으쓱하고 털어버리는 나. 그런 내가 되면 참 좋을 텐데.


  문제는 내가 그런 위인이 아니라는 거다.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있고, 그 문제에서 스트레스받은 나는 무의식 중에 달콤한 인생을 바라며 다 먹지도 못할 아이스크림을 사들이고 있다. 나는 스트레스 따위 받지 않는 사람이라며 계속 다른 데로 눈을 돌리면 폭발할 거다. 나의 멘탈도, 아이스크림으로 가득 찬 우리 집 냉동실도.


  인정하기 싫지만 지금 나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내일이 오는 게 무서워 밤이면 잠을 못 자고 회사 가는 게 싫어서 아침이면 일어나질 못한다


두 번째 거짓말, "이렇게 좋은 사람들한테 스트레스받을 리 없지."

  여느 회사가 그렇듯 우리 회사도 50가지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명암이 매우 뚜렷한 곳이라 밝은 부분을 보는 사람에겐 다닐 만한 곳인데 어두운 부분을 보는 사람에겐 이만한 지옥이 없다. 그래, 사실 어두운 부분이 심하게 많긴 하다. 그렇게 오래 다닌 것도 아닌데 벌써 많은 사람들이 여길 떠나는 걸 지켜봐 왔다.


  그리고 지금은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몇 명이 마지막이 될 듯한 고민 중이다. 그동안 맞닥뜨린 수많은 문제들을 함께 쳐내며 뭉쳐온 사람들이고 처음으로 팀워크가 뭔지 이해하게 해 준 사람들이다.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회사를 떠날 때마다 나라도 스트레스를 덜어 주고 싶어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상황 자체가 나에게 스트레스일 수 있단 걸 무시하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그 감정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더라도 지칠 수밖에 없나 보다. 이걸 인정하기 싫었던 건 회사 때문에 힘들어하는 그들이 정말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감히 그들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나. 부모님께 서운한 게 있더라도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내 인생은 문제없다고, 주문처럼 되뇌어 온 하얀 거짓말이 내 마음을 까맣게 만들었다. 나 자신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스스로 해온 거짓말을 거둬들여야겠다. 인생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지금 하면 거짓말이다. 지금 내 인생은 꼬여 있다. 이걸 인정해야 꼬인 걸 풀던가 끊던가 좀 더 버텨 보던가 결정할 수 있다. 해결할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은 그다음이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좀 더 내 마음에 솔직해질 수 있을 때까지 결정을 미루기로.


위의 빨간머리 앤 캡쳐는 이런 짤방으로도 바뀌어 돌아다니고 있다.



* 매주 수요일, 취향 가득 담긴 제 글을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매일매일 읽을거리]도 소소하게 운영 중이에요:)

매거진의 이전글 모두가 꿈의 직업을 가질 순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