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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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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Sep 24. 2017

모두가 꿈의 직업을 가질 순 없다

항상 '꿈꾸면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괜찮아!

  살다 보니 아는 분이 인기 작가가 되기도 한다.


  워낙 필력이 좋으신지라 카피라이터가 아니라 전업 작가를 하셨어도 어울렸겠다 생각했던 분인데. 우와. 이렇게 첫 책을 내셨구나. 산뜻한 디자인의 표지를 펼치자 작가의 성정 고스란히 담긴 따뜻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왜 이런 훈훈한 글을 읽는 동안 내 마음엔 에어컨이 켜졌지? 그분을 멘토로 부르던 시절 꾸던 이루지 못한 꿈이 떠올라서일까.


  한때 내 꿈은 카피라이터였다.


  20대 초반 처음 가지게 된 그 꿈에 본격적으로 발을 딛게 된 건 한 광고회사에서 진행하던 대학생 광고 교육 프로그램에서였다. 어찌저찌 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카피라이터 지망생으로서 한 자리를 차지했을 때 얼마나 기쁘던지. 6개월 활동을 수료하고 나면 개중 우수한 몇 명을 그 회사 인턴으로 뽑아간다는 소문도 있었다. 대단한 친구들만 모인 프로그램이었지만 그래도 그 인턴 자리 중 하나쯤은 나에게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다.


  특강을 듣고 과제를 제출하고 PT를 하고. 돌이켜보면 무슨 열정으로 그렇게 많은 밤을 지새웠나 스스로 대견하다 싶은 시절이었다. 정신없이 지나간 반년, 그리고 다가온 해단식과 마지막을 기념하는 1박2일 워크샵. 얼핏 보면 평소와 다르지 않은 왁자지껄한 술자리었지만 내일 발표될 우수 참여자 명단 때문에 약간의 긴장감이 있었다. 애써 결과를 생각하지 않으려 마시지도 못하는 술에 입을 대는데 프로그램 전반을 총괄하시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님이 전에 없던 진지한 표정을 하고 나에게 말을 건네셨다.


  "나도 카피라이터 출신이고 그동안 네가 쓴 글을 봐 왔어. 여름이 글 잘 쓰지. 운동에 비유하자면 너는 기초체력이 좋아서 어떤 운동을 해도 잘해나갈 수 있는 선수야. 그런데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운동이 야구도 수영도 아닌 축구가 맞을까? 좀 더 생각해 보면 좋겠다."


  왈칵 눈물보가 터졌다. 이 일이 너와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상냥하게 해 주시다니. 이 곳과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구나. 최선을 다한 것 같은데 그래도 내가 부족했구나. 남은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부은 눈을 비비며 기념사진을 찍은 게 그 회사와 나의 마지막이었다.


  그 CD님께 선구안이 있던 걸까. 이후에도 공모전에 나가고, 취업 스터디에 참여하고, 영어점수도 만들어두며 크고 작은 광고회사에 카피라이터로 이력서를 수십 장 넣었지만 서류전형에서건 면접에서건 모조리 떨어졌다. 취준 재수 삼수를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주위에선 카피라이터 직군이 TO 자체가 적어서 어쩔 수 없다며 위로해 줬지만 그래도 꽤 오랫동안 우울했었다. 생생히 꿈꾸면 이루어진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어. 이대로 나이만 먹으면 이제 어디든 취직하기 힘들어질 거야. 정말 간절한 꿈이었는데 시작도 못한 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한 스타트업 채용공고에서 재밌어 보이는 직무를 발견해 이력서를 툭 넣어 봤는데 너무나도 쉽게 직장인이 되어 버렸다. 카피라이터가 되는 건 그렇게 어려웠는데 이건 왠지 이거대로 씁쓸한 기분이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나는 콘텐츠 담당자로 일하고 있다. 카피라이터를 꿈꾸던 때에는 이런 직무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는데 이젠 곧잘 페이스북 광고도 돌리고 카드뉴스도 만든다. 글 쓸 일도 꽤 많다. 아직 사회 초년생이라 섣불리 말하긴 어려워도 아직까지 일이 재밌는 걸 보면 잘 골라잡았구나 싶다.


  카피라이터가 아니더라도 운 좋게 만족스러운 일을 하게 된 건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던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트렌드의 최정점에 있는 직업이니까 지금처럼 온갖 잡다한 것에 관심 가지는 게 내 강점이 되겠고

2. 글 쓰는 걸로 안정적인 벌이가 가능한 몇 안 되는 일인데다

3. 나중에 수필이던 소설이던 책을 낼 때 카피라이터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게 유리할 것 같아서.


  그런데 스타트업에서 콘텐츠 관련 일을 하는 것으로도 저 항목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콘텐츠 담당자로서는 물론이고 스타트업 소속으로서도 트렌드를 놓치지 않아야 건 당연지사. 안정적인 벌이는 물건너 갔어도 다양한 형태로 글을 많이 쓸 수 있는 건  만족스럽다. 거기에 카피라이터만큼은 아니더라도 스타트업 직원이라는 소속이 나에게 다양한 쓸거리를 가져다준 게 분명하다.


  간절히 원한다고 바라는 모든 걸 이룰 순 없다. 정말 최선을 다했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은 포기해도 비겁한 게 아니다. 그렇기에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은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왜 그 직업을 갖고 싶어하는 건지 근본적인 이유를 알아내는 거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TO가 없다거나 전공이 맞지 않다거나 재능이 부족했다거나 다양한 이유로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못했다면 시작할 수 없는 일이 많다. 하지만 새롭게 생겨나는 재미있는 일들도 그만큼 많다. 내가 직업을 통해 뭘 얻고 싶은지 파악하고 있다면 좀 더 다양한 기회를 망설임 없이 잡을 수 있을 거다.


  카피라이터가 되지 못했어도 내 인생은 나름 즐겁다. 상냥하던 CD님도, 따뜻하던 카피라이터님도 사수로 모시지 못한 건 아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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