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야 괜찮아, 난 충분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이름 정도만 알고 지내던 대학 후배가 회사 때문에 고민이 있다며 나를 불러냈다. 얼마나 도움이 필요했으면 나한테까지 연락을 할까 싶어 두 말 않고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서 만난 후배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른 분을 먼저 만나고 있었는데 그분과 나누던 이야기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나. 후배의 당황한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그럼 저녁이라도 같이 드실래요?"라고 물어봤더니 그분은 마침 배고팠다며 흔쾌히 승낙했다.
서로 인사를 마치고 주문한 메뉴가 나올 때쯤 후배가 슬쩍 고민을 꺼냈다. 회사 대표의 잦은 폭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거였다. 듣자 하니 월급은 적고, 장점이라고는 집에서 가깝다는 점밖에 없어서 '그러면 회사를 옮기는 건 고려하고 있냐'라고 물어보려던 순간. 본인을 심리상담가라고 소개한 그 후배의 지인분이 "나한테도 직장 관련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이 많은데~"라며 받아쳤다.
"솔직히 어느 회사나 문제는 있어. 다들 참고 다니는 건데, 내가 보기에 너는 끈기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 좀 더 버티면서 끈기를 길러 보는 건 어떨까?"
그러면서 '본인의 신념을 가지고 버티다 보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을 이어갔는데 요즘 심리 상담 트렌드는 독설인가 싶었다. 말이 지나친 것 같아 초면에 실례를 무릅쓰고 흐름을 바꿨다. "아, 상담 일 하시면 이런 고민 많이 들으시겠어요~"하니 한동안 본인의 직업이 얼마나 큰 보람을 주는지 신나게 이야기하셨다.
"그런데 여름님은 어떤 일을 하시나요?"
마케팅을 한다고 했더니 학부 시절 전공이 그쪽이냐고 물어보기에 그건 아니라고 했다.
"아... 요즘 전공을 살리지 못하는 분들이 많죠. 취업난이 심하니까요. 그런 분들은 누가 물어보면 괜찮다고는 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픔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안타깝더라고요. 여름님도 그렇지 않으세요?"
"? 아뇨."
내 선택으로 전공과 상관없는 직업을 고른 거라 하나도 안 아쉽다니까 그때부터 그 사람의 타깃은 내가 되었다.
"결혼 이야기 나올 나이시죠, 연애는 문제없으신가요?"
"마음 터놓을 친구는 있으세요?"
"회사를 옮기고 싶단 생각은 혹시 안 하시고요?"
"혼자 살다 보면 외롭지 않으세요? 아파도 간호해 줄 사람도 없고..."
등등.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 아픔'을 가져야만 한다는 식이었다. 초면에 실례를 짜르봄바급으로 투척하는 그 분의 말에 나는 연애도 문제없고 친구도 있고 지금 회사도 마음에 드는 데다 잘 아프지도 않아 간호는커녕 외로울 새 없어 다행이라고 받아쳤다.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해서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것도 익숙하고.
"그래서 독립성이 높으신가 봐요. 좋네요. 그런데 어릴 때부터 가족들과 떨어져 살면 가족끼리만 맺을 수 있는 유대 관계는 얻지 못하셨겠어요. 진짜 내 편은 가족밖에 없다는 말도 있는데..."
그래, 내 오해가 아니었구나. 이 사람은 어떻게든 나한테서 흠을 찾아내려고 취조 중이네.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건 제 선택이었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살지 않았다면 제가 원하는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을 거고, 지금처럼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몰라요. 가족 간의 유대 관계를 어느 정도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걸 선택한 거라 저는 좋습니다. 행복해요."
집에 오는 내내 후회했다. 좀 더 일찍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야지.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는 거냐고, 실례인 것도 모르냐고, 나는 그쪽에 심리상담을 요청한 적이 없다고 따질 걸 그랬다. 타인의 부족함을 찾아내려고 그렇게까지 애쓰는 사람은 살면서 처음 만났다. 나도 나지만 함께 있었던 두 시간 동안 몇 마디 나누지 못한 후배도 걱정이었다. 회사 생활이 힘들다고 한마디 했다가 그건 네 잘못이라며 생각지도 못한 지적을 받은 건데.
그 상담가는 '부족한 점이 뭔지 알고 그걸 채우려 노력하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마음에 여유가 있는 경우면 도움이 되겠지만, 당장 눈앞이 깜깜한 사람에게 그건 네 단점 때문이라고 말해 봐야 궁지로 몰아넣는 것밖에 안 된다. 다른 사람의 단점을 지적하며 우월감을 느끼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그 방법은 틀렸다.
힘든 상황을 이겨내 한 발짝 더 앞으로 내딛게 하는 힘은 내가 그 정도 힘든 것쯤은 이겨낼 장점을 가졌다는 걸 아는 데서 나온다. 회사가 별로여도 다른 회사로 이직할 만한 능력을 가졌으니까 괜찮아.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도 혼자서 내 삶을 잘 이끌 독립성이 있으니까 괜찮아. 수많은 문제들이 있었지만 결국은 어떻게든 해결해 왔으니까 괜찮고말고.
나는 단점이 많은 사람이다. 가난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고, 사교성이 좋지 않고, 학창 시절 왕따도 당해 봤고, 게으르기도 하고. 하지만 이 모든 단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장점들도 가지고 있다. 어떤 나쁜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 상황에서 교훈을 찾아내는 긍정성과 그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데서 오는 높은 회복탄력성. 무엇보다 단점을 이기는 장점이 있다는 걸 아는 게 나의 가장 큰 장점이다. 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도! 이상한 사람에게 기분 나쁜 말을 들은 날이었지만 그걸 소재로 글을 써 보니 나름 괜찮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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