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이 내 명줄을 짧게 만들었을지도 몰라
"여름님 요즘 운동 열심히 한다. 대단한데요?"
"에이~ 매일매일 헬스 다니는 분들도 많은데요. 저는 별 것 아니에요."
움직이는 걸 정말 귀찮아하지만 억지로라도 일주일에 세 번씩 운동을 다니기 시작한 지 3달째다. 나도 내가 이렇게 꾸준히 운동을 계속할 줄 몰랐는데 무이자 3개월 할부, 4개월치 선결제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그동안 퇴근하고 뭐 하냐고 물어올 때마다 운동 간다고 했더니 이젠 주위에서도 내가 운동을 자주 하는 사람으로 보이나 보다. 칭찬에 관성처럼 겸손한 사양이 튀어나왔다. 색다를 것 없는 일상 속 대화였다.
그런데 얼마 전 이런 글을 보았다.
자기 또래보다 몸을 많이 움직이며 활동적으로 사시는 편인가요? 덜 활동적인가요? 아니면 또래 평균 정도인 것 같나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가 앞으로 수십 년이 지난 뒤 실제 활발한 정도와 무관하게 때 이른 죽음을 맞느냐 혹은 더 오래 사느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 연구진은 자신이 또래에 비해 더 활동적으로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실제 활동량이 비슷한 경우에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수명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 출처 : 뉴스페퍼민트, <뻔하지만 종종 간과하는 장수의 비결: 마음가짐>
무난한 겸손의 표현이라고만 생각했던 "저는 별 것 아니에요."라는 말이 내 땀과 시간과 돈을 말짱 도루묵으로 만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니. 이때부터였다. 내가 평생을 믿어 온 겸손의 힘을 의심하게 된 것이.
사전 속 겸손의 의미에서 내가 방점을 찍어온 것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다. 환경 핑계를 대고 싶진 않지만 내가 졸업한 중고등학교는 칭찬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뒤에서 나쁜 소문이 돌지 않는 살벌한 곳이었다. 아니, 어쩌면 나한테만 살벌한 곳이었을 수도 있다. 은근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땐 급식에 나온 방울토마토가 시길래 인상을 찌푸렸다 "너 토마토 처음 먹어보니? 왜 그렇게 난리야?" 라며 별난 애로 3년 찍혔고, 고등학교 땐 별나 보이는 큰 목소리를 들키기 싫어 입 가리고 웃었더니 "쟤 뭐냐?" 소리 듣고 내숭 떠는 애로 3년 찍혔다. 가뜩이나 내가 뭔 짓을 해도 눈엣가시 취급이었는데 그 와중에 공부를 잘하는 축에 들었으니 '똑똑한데 개싸가지없다'는 뒷담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에서 겸손하게 내 성적표나 상장을 숨기지 않았다면 은따가 아니라 왕따로 전직했을 거다.
우울한 이야기는 다행히 여기까지다. 대학교 다니고부터는 별나다는 걸 재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주는 사람을 많이 만난 덕에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 받을 일 없이 잘 지내왔다. 다만 은따 생활은 나에게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는 강박을 남겼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이뤄낸 무언가를 스스로 긍정하면 뻔뻔하다거나 재수없다거나 아무튼 안 좋은 평판을 얻을 것 같다. 나쁜 말을 듣기 싫다면 겸손해야지. 그게 결국 나를 위한 거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주입된 겸손은 내가 스스로를 칭찬할 수 없게 만든다.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게 한다. 스스로를 별 것 아닌 아닌 사람으로 만드는 셈이다. 주 3회 운동을 별 것 아닌 걸로 만들어서 내 잠재 수명을 깎아먹고, 종종 칭찬받는 내 글도 별다를 것 없는 잡문으로 만들어서 더 재밌는 글을 많이 쓰겠다는 욕심을 감히 가지지 못하게 한다.
나 잘하고 있다. 졸린 눈꺼풀 억지로 떼 가며 추리닝 챙겨 입고 운동 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뼈와 살밖에 없던 팔뚝에서 이제 근육이 조금이나마 만져진다. 글도 나름 열심히 쓰고 있다. 내 소소한 이야기를 읽어 주는 사람도 없지 않다. 이만하면 잘하고 있는 거지. 지금 잘 하고 있으니까 앞으로 더 잘해보자. 더욱 건강한 돼지가 되어 맛있는 걸 실컷 먹어도 문제없을 때까지, 글을 지금보다 더 잘 써서 글 쓰는 일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을 때까지.
이제 스스로를 좀 칭찬해 줘야겠다. 칭찬을 거부하는 지나친 겸손은 나에게 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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