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서 혐오자가 마음을 바꿔먹은 이야기
이번 추석 연휴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엔 너무 길었다. 하루 종일 만화책만 산더미처럼 읽어치우기도 하고, 백수 시절처럼 게임을 하며 밤을 꼴딱 새기도 하고, 그렇게 뒹굴거리다 시간을 탕진하는 것에 지쳐 <타이탄의 도구들>이라는 책을 꺼내 들기도 했다. 친구 추천으로 사둔 책인데 잠깐 훑어본다는 게 앉은자리에서 다 읽어 버릴 만큼 마음에 들었다. 열심히 줄을 치고 메모를 하고 호들갑을 떨며 친구들에게 인상 깊은 구절을 보여줄 정도였다.
"경쟁자가 아니라 위대한 사람의 영감을 활용해야 한다. 경쟁자 따위가 당신을 조종하게 만들지 마라. 우리는 더 좋은 노래를 만들려면 미술관에 가서 수백 년을 사랑받은 그림을 봐야 한다. 불멸의 소설을 읽고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영화를 보고, 인류가 위안과 평화를 얻어온 시를 읽어야 한다. 위대한 작품에 당신의 몸과 마음을 푹 담가야 한다.(...)"
- <타이탄의 도구들> 중
이 책의 저자 팀 페리스는 200명의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타이탄)'을 인터뷰해 그들이 말한 성공의 비결을 고스란히 정리해 두었다. 책에 등장하는 타이탄 중에는 알랭 드 보통이나 말콤 글래드웰 같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는 물론 픽사 회장인 에드 캣멀처럼 크리에이티브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인물들이 여럿 있다. 그 덕에 콘텐츠에 욕심 많은 나에겐 와 닿는 문장이 특히 많았다. 그나저나 무슨 책이냐고 물어보는 친구에게 제목을 말해줘야지. 책 정보를 캡처해서 보내는데 이제야 눈에 띄는 이 책이 속한 카테고리, '자기계발'.
아... 몰랐으니 읽었다.
나 자기계발서 진짜 싫어하는데.
내 인생 마지막 자기계발서는 <시크릿>으로 정해두고 있었는데 당황스러웠다.
10년 전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달콤한 말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어모은 자기계발서의 대명사 <시크릿>. 당시 수능을 앞둔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도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그 소망을 이루어진다는 '끌어당김의 법칙'은 거부할 수 없는 링딩동, 루시퍼의 마력으로 다가왔다. 눈이 녹으면 봄이 오고, 염소라 하면 메에에 울음소리만 떠오르는 뼛속까지 문과생인 1인으로서 과학적인 근거를 따져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래, 내 스트레스의 근원인 수학 성적이 오르길 간절히 바라보자! 책에서 말한 것처럼 수학 1등급을 이미 받은 것처럼 행동하면 수능 땐 진짜 1등급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서너 달 동안 행복회로를 풀가동했다.
하지만 3년 내내 공부 시간의 절반 이상을 투자한 수학은 수능에서도 내 발목을 잡았다. 그래, 간절히 바라면 뭐든 이루어진다면 세상 사람들 다 서울대 가고 로또 맞고 하겠지. 물론 간절한 바람에서 나온 긍정적인 마음이 인생 사는 데 도움은 되겠다만 책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좋은 일을 더 많이 불러온다" 뿐이라면 굳이 이삼백 페이지를 내리 읽을 수고를 할 필요가 없는 거였다. 아까운 내 시간, 아까운 내 에너지. 앞으로 이런 자기계발서는 다신 읽지 말아야지.
<시크릿>과의 잘못된 만남도 이제 옛 이야기가 되었고 그새 많은 시간이 지났다. 수능 수학을 망친 것보다 더 심각하고 다채롭고 묵직한 시행착오도 여럿 있었다. 그 시행착오들을 해결해 가며 인생의 짬, 즉 나이를 먹었달까. 그 속에서 얻은 나이테는 내가 선택한 취향과 반드시 지켜내고 싶은 소중한 가치, 그 속에서 굳건해진 주관이다. 다른 사람의 가치 또한 존중해줄 수 있다면 강한 주관은 편안하고 즐거운 삶에 도움이 된다. 나 자신이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을 가까이하거나 멀리하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으면 수없이 많은 정보 중 나에게 필요한 것들만 쏙쏙 골라 곁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계발서는 다른 어떤 장르보다 직설적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드러낸다. 아침형 인간이 성공해! 끈기 있게 한 우물만 파는 사람이 성공해! 이렇게 하면 너도 성공할 수 있어! 등등. 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모두 마음에 담아둘 필요는 없는 거였다. 내 주관이 확실한 만큼 그중 나에게 필요한 것, 내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 내 것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응~ 아니야~' 하며 책을 덮으면 그만이고.
사실 자기계발서 분야가 아니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작가나 책은 수두룩하다. 제일 편히 찾아 읽는 소설 분야, 거장들의 책도 내 취향에 맞지 않는 게 얼마나 많은데 자기계발서만 장르 자체를 권종차별하고 있다니 좀 미안해졌다. 자기계발서 혐오를 멈추니 비로소 보인다. 자기계발서만큼 순식간에 열정을 불어넣어 나태함을 떨치게 만드는 책은 흔치 않다. 좋은 자기계발서는 인생의 치트키처럼 빠른 통찰을 주고 더 나은 삶을 살 마음을 먹게 한다.
나에게 맞는 내용을 골라낼 주관만 확실하다면 자기계발서는 나쁘지 않다. 자기계발서라는 장르 자체가 허들이 되면 <타이탄의 서재들>처럼 내 잉여로운 뒹굴거림을 멈추고 장판에 달라붙은 몸을 일으키게 할 귀한 책을 만날 기회가 두 번은 없을지도 모른다. 1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무시했던 자기계발서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내가 좋아하는 한 편의 시를 패러디해 바친다.
자기계발서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열정을 주는 사람이었느냐
1) <타이탄의 서재들> 본문 내용이 조금 더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제가 운영하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인상 깊은 구절을 좀 더 정리해 두었습니다. >> https://goo.gl/EPp895
2) 혹시 <타이탄의 서재들>을 읽어보실 분들을 위해 사족을 덧붙입니다. 제3장 이후에 일부 수록되어 있는 '건강 비결'(간헐적 단식 등)은 맹신하기보다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신 후 나에게 맞을지를 판단하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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