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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un 04. 2017

그곳에 사람이 있다면, 어디든 이야기가 있다

feat. <빛의 아버지>

  저는 게임 <오버워치> 유저입니다. 브런치 아이디를 보고 눈치채신 분도 계실 것 같아요. "이것도 너프해 보시지(Nerf this)!"라는 필살기 대사로 유명한 D.va가 제 주 캐릭터입니다.


최고다! D.va짱!


  한 달을 다닌 회사에서 갑작스레 해고당하고 다음 회사를 찾아다니던 두 달 남짓. 여느 채용과정이 그렇듯 면접과 면접 사이는 떨쳐낼 수 없는 불안과 초조로 가득했습니다. 이런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수 시절 오버워치를 참 많이 했었지요.


  오버워치는 한 팀을 이룬 6명의 캐릭터 조합이 중요한 게임입니다. 공격군에 있는 캐릭터가 멋있다는 이유로 모두가 공격 캐릭터만 고른다면 그 판은 더 볼 것도 없이 지고 맙니다. 높은 체력과 방어 기술로 최전선에서 팀원들을 지키는 돌격 캐릭터, 후방에서 팀원들의 체력을 채워주는 회복 캐릭터가 있어야 적진을 뚫고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물론 승리의 영광은 쉽게 찾아오는 게 아니었죠. 혼자 하던 게임, 매판 무작위로 매치된 팀원들은 끔찍한 조합만을 이루곤 했습니다.


  하지만 운수 좋던 어느 날. 드디어 팀 조합을 잘 맞추는 분들과 한 팀이 된 겁니다. 순식간에 그 판을 이긴 우리는 의기투합해 그룹을 만들어 같이 게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함께할 때 더 강했고, 훌륭한 팀워크로 얻어낸 승리는 값졌습니다. 취준생으로 지내며 패배감에 젖어 있던 저는 "여름님 디바 잘하시네여!"라는 칭찬을 들으며 조금씩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고요.


  셧다운제 어쩌구, 게임을 광적으로 즐기던 사람이 저지른 범죄 저쩌구. 요즘에야 나아지고 있다지만 '게임=나쁜 것'으로 규정해 버리는 사회의 시선은 아직도 매섭습니다. 에이, 부정적인 면만 강조되는 게 안타까울 만큼 게임의 긍정적인 면도 어마어마하다고요. 오늘 소개해 드릴 <빛의 아버지> 프로젝트를 진행한 '마이디' 씨는 게임을 향한 부정적인 편견을 깨려고 노력하는 일본의 유명 게임 블로거입니다.


<파이널 판타지 14>의 마이디 씨


  빛의 아버지 계획, 그것은 예순을 넘은 나이에도 게임을 좋아하는 아버지께 파이널 판타지 14를 플레이하게 하고, 저는 정체를 숨기고 친구 등록. 함께 모험하다 어느 날 자신이 친아들인 것을 밝히는 장대한 효도 계획.
                                                                                                                                - <빛의 아버지> 중


  게임 <파이널 판타지 14>가 서비스되던 초창기부터 블로그를 운영하며 게임의 즐거움을 알려오던 마이디 씨. 그가 친구 초대 이벤트 특전을 얻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를 파이널 판타지 에오르제아 세계로 끌어들인 것이 이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짧은 에피소드로 끝날 수도 있었던 <빛의 아버지> 계획은 아버지가 파이널 판타지에 푹 빠지게 된 덕에 2014년 8월부터 2016년 3월까지 총 32화의 대장정을 이루었습니다.


레전드의 시작을 만들어낸 친구초대 이벤트 보상, 이인승 초코보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파이널 판타지 같은 RPG 게임은 한판에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오버워치보다 유저 간 커뮤니케이션이 게임의 재미를 더 크게 좌우합니다. 다른 유저들의 도움을 받아 퀘스트를 달성하고 그룹을 만들어 보스 몬스터를 잡는 과정에서 쌓이는 것은 게임 경험치만이 아닙니다. 게임을 함께 하는 팀원들 사이에서 생겨난 끈끈한 유대감은 실제 사회 못지 않은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게임 속 세상을 제2의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 사회에서 아버지와 마이디 씨는 아버지와 아들이 아닌 동료로서 마주합니다. 나이를 먹어 가며 접점이 사라져 서먹했던 부자 관계가 게임을 통해 바뀌게 되죠. 팀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게임 공략집을 정독하는 노력, 계속되는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고 보스 몬스터를 해치우는 끈기 등. 아들은 아버지가 영업맨으로 오랜 세월 승승장구해온 이유를 비로소 발견합니다. 아버지를 향한 존경과 사랑 또한 더욱 깊어집니다.


인터뷰 중인 마이디 씨와 '빛의 아버지'


  빛의 아버지 계획을 지켜보며 울고 웃은 많은 사람들 덕에 이 프로젝트는 게이머 커뮤니티를 넘어 온라인 전역에 널리 입소문 났습니다. '빛의 아버지를 보고 파이널 판타지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신규 유저들도 늘어났고요. 기세를 이어 프로젝트는 책이며 드라마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마이디 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드라마화 과정을 <빛의 P(프로듀서)씨>로, 매편 드라마가 방영된 후 드라마 제작 뒷이야기를 <빛의 D(디렉터)씨>로 연이어 선보였습니다.


  속편이 1편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건 토이스토리와 빛의 아버지 시리즈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빛의 P씨에서는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드라마 프로듀서가 되어 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어내고 싶다!'는 P씨와 '게임을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회의 편견을 깨고 싶다!'는 마이디 씨의 염원이 어떻게 결실을 이루어내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빛의 D씨는 드라마가 방영될 때마다 그 편의 제작 비화와 담아내고자 노력했던 메시지를 대담 형식으로 풀어내는데 이것도 재밌어요.


7부작 미니시리즈로 나온 <빛의 아버지>! 우리나라에선 넷플릭스로 7월 즈음부터 볼 수 있대요.


  드라마 <빛의 아버지>는 일본 드라마 특유의 과장된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라 보면서 손발이 꽤 오글거렸습니다. 하지만 팬심으로 꿋꿋이 시청하다 보니 마지막화가 다가올수록 '내가 이렇게 애정을 가지고 본 드라마가 있던가' 싶네요. 게임 아이템이 갖고 싶다는 사심 가득한 마음으로 시작된 소소한 이야기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는 작품이 되다니. 읽을거리를 좋아하는 서브컬처 덕후이자 한 명의 게이머로서 저까지 괜히 코끝이 찡해집니다.


<빛의 D씨> 6화 중. 번역본 출처는 http://blog.naver.com/wdrop14/221015605546


  제가 브런치에서 '여름'이라는 이름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한 지 벌써 1년이 되었습니다. 상상 이상으로 많은 분들이 제 글을 읽어 주시고 댓글을 건네 주신 덕에 여러 즐거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갑작스레 해고당했을 땐 많은 분들이 힘을 돋우는 이야기를 해 주셨고, 또 갑작스레 취직 소식을 알렸을 땐 근황이 궁금하다며 안부를 물어봐 주셨고요. '좋아요'와 댓글 푸시 알림이 오는 순간마다 제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얻는지 모릅니다. 빛의 아버지를 또 한 번 정주행하며, 저의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며 생각합니다. 온라인 세상에 발을 들여놓길 정말 잘했다고요. 두 개의 사회를 살아가며 얻는 두 배의 즐거움, 짜릿해! 늘 새로워! 최고예요!


* 파이널 판타지 게임 이미지 출처는 모두 마이디 씨의 블로그 <일격확살 SS일기>입니다.

* <빛의 아버지>는 여기, <빛의 P씨>는 여기, <빛의 D씨>는 여기에서 번역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 매주 수요일, 취향 가득 담긴 제 글을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매일매일 읽을거리]도 소소하게 운영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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