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이동건, <유미의 세포들>
한 명의 덕후로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건 큰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겨울왕국>이 1000만 관객, <너의 이름은>도 300만 관객을 너끈히 넘은 시대잖아요. 더 이상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것이 어린애 취미라던가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취향으로 취급되지는 않는 듯합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 만화는 웹툰이라는 친근한 형태로도 대중화되었습니다. 네이버나 다음 같은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전국민이 만화를 보는 세상이라니! 좋아하는 웹툰 연재 덕분에 일상 속 즐거움이 늘었습니다.
<유미의 세포들>은 제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웹툰입니다. 유미라는 30대 초반 여성의 일상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뇌세포들의 활약이 주 내용인데요, 야행성인 감성 세포라던가 섹드립 전문 응큼 세포라던가 다른 세포들을 모두 씹어먹는 위력을 가진 출출 세포라던가! 개성 가득한 수많은 세포들이 유미의 행동을 만들어 낸다는 설정입니다.
세포들 중에는 유난히 강력한 '프라임 세포'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프라임 세포를 가지는데 유미네 프라임 세포는 위 사진의 사랑 세포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미의 세포들>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건 유미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유미의 짝사랑, 유미의 소개팅, 유미의 연애 등등등. 그래서 2년 전쯤 처음 <유미의 세포들>을 읽었을 땐 설정이 독특한 로맨스물인 줄만 알았습니다. 묘사가 신선하네, 귀여운 웹툰이네 정도로 여겼고요. 하지만 지금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웹툰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장면 때문입니다.
왜 그런 우스갯소리 있잖아요. 한국에선 의학드라마건 법정드라마건 직장드라마건 모든 소재의 드라마가 기-승-전-로맨스로 흘러간다고. 드라마뿐 아니라 영화든 음악이든 많은 장르에서 로맨스는 단골 소재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만 그런 것도 아니고요. 로맨스의 범람을 나쁘다, 좋다 논하기 이전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로맨스를 원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저부터가 그렇고요. 제 뇌세포 중에는 소녀감성 세포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삶이 질릴 때면 만화방으로 달려가 순정만화를 정주행하면서 당을 충전하거든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인생에서 단맛만을 찾아 헤매던 때도 있었습니다. 공부가 힘들던 때, 취직이 안 되던 때 등등등. 현실도피 겸 당충전을 위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연애였습니다. 인생의 쓴맛을 연애라는 조미료로 덮으려는 생각이었는데, 조미료 범벅에서 좋은 맛이 나올 수 있나요. 결국 연애만으로 달콤한 인생을 만들 순 없더라고요. 그때 했던 모든 연애들은 저를 더 못나고 부족한 사람으로 만들 뿐이었습니다.
제 인생이라는 이야기에 남자 주인공은 따로 없다는 걸,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 한 명뿐이라는 걸 그땐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주인공이라니. 외모가 특출한 것도 아니고 유별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스포트라이트를 혼자 받아도 되는 걸까. 이야기가 흥할 것 같지 않으니 남자 주인공을 섭외해 로맨스를 만들어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어요. 애초에 저 말고는 모두가 조연인 이 이야기를 망치기만 하더라고요.
어떻게든 주인공 혼자 이끌어가야 하는 인생이라는 이야기. 유미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상황들을 스스로 헤쳐나가는 멋진 주인공입니다. 많은 고민을 불러일으키는 직장 내 부서 이동이라거나 갑자기 나타나 마음을 뒤흔드는 전남친 연락 같은 것들 모두. 이동건 작가는 아이즈IZE와의 인터뷰에서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에게 사랑받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그것과 남자에게 의지하는 건 다르다고 본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걸 좋아하지만 사랑에 의지하지 않는 유미, "유미는 무조건 무죄!"를 외치는 판사 세포를 포함해 유미만을 위해 존재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세포들. 이 웹툰을 읽다 보면 나는 유미처럼 멋진 주인공으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짐합니다. 더 이상 제 이야기에서 또다른 주인공을 찾아 헤매지는 않겠다고, 저 혼자서도 멋진 이야기를 만들겠다고요.
* 글 내 모든 이미지 출처는 웹툰 <유미의 세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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