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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r 18. 2018

나를 슬프게 하는 숫자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이직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이유

  평범한 일요일 대낮. 내일로 성큼 다가온 월요일이 무서워 초조함을 잊으려 휴대폰을 잡았다. 침대에서 뒹굴뒹굴 무념무상 페북 타임라인을 살피는데 엄청난 걸 발견했다.


이 분 최소 얼굴천재


  세상에. TV를 보지 않으니 이런 후광 쩌는 아이돌을 이제야 발견했다. 이름이...차은우? 힐링용 사진을 찾아보려고 구글링 하자마자 그의 나이가 나왔다. 1997년생. 오빠라 부르고 싶었는데 내가 많이 누나였네.


...라고 하기엔 양심을 돌아보게 하는 나이 차이였다.


  1997, 1997… 그깟 숫자가 뭐기에 나를 슬프게 하나, 생각했더니 또 다른 숫자가 떠올랐다.

3000000000, 30억.


  얼마 전 한강 산책하다 '이런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 집은 얼마나 할까' 싶어 찾아본 그 동네 아파트 시세다. 10년 후에 저런 데서 살려면 한 달에 얼마를 벌어야 되는 거야? 계산기 앱을 켰는데 어머나. 아이폰 6s 기본 계산기 앱에서는 저 숫자의 마지막 0이 입력되지 않는다. 3억이 한계. 화면을 가로로 회전시켜야 까마득한 30억을 적어 넣을 수 있다.


  계산기도 버겁다는 30억을 10년 만에 모으려면 한 달에 2천5백만 원씩 저금해야 하는 거였다. 신입 때 내 연봉이 저 정도였는데.


  어떤 숫자는 너무 적어서, 어떤 숫자는 너무 커서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런데 어떤 숫자는 내 슬픔을 속이는 데 쓰이기도 한다.


  카드뉴스 몇 개, SNS 광고 몇 개, 블로그 글 몇 개. 내 업무는 시간에, 개수에 매몰되어 있다. 최소 시간으로 최대한 많은 것들을 만들어내야 성과로 인정받는 업무 환경이다. 내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생각이 꼬리를 무는 걸 잘라내고 '뭐라도 많이' 만들어내야 한다. 퇴근길엔 오늘도 이만큼 많은 일을 해냈다며 한숨 돌린다. 와, 생산적인 하루였어. 그러고 집에 가면 책을 읽는다. 일주일에 몇 권이나 읽었나 기록도 한다. 두 권을 읽으면 흐뭇, 세 권을 읽으면 뿌듯하다. 와, 생산적인 한 주였어.


  이렇게 회사에서 하는 일 중 몇 개나 내 포트폴리오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이렇게 읽은 책 중 몇 권이나 눈을 반짝이며 소개할 수 있을까.

이쯤 되면 숫자로 애써 저급 뿌듯함이나마 만들어내며 위안 삼고 있는 건 아닐까.



어른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어른들을 나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린이는 어른을 항상 너그럽게 대해야만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생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우리에게 숫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 <어린 왕자> 중 


  숫자는 중요하다. 월급 뒷자리에 0이 하나만 빠져 들어와도 난리를 칠 어른이 된 나인걸. 대신, 가질 수 없는 숫자 때문에 아쉬워하진 말자. 나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숫자다. 30억? 지금 당장은 대출로도 당겨올 수 없는 숫자다.


  그리고 인생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하지 않은 숫자는 말끔히 지워버리자. 하루에 몇 개의 일을 쳐내는지, 일주일에 몇 권의 책을 읽는지 헤아리며 뿌듯해하지 말자. 내 이름을 당당하게 내걸 수 있는 걸 많이 만들자. 두근거리며 이야기할 수 있는 걸 많이 보자. 그러려면 이제 진짜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떠나야겠다.


  퇴사해서 잘 지내고 있는 옛 직장 동료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하늘에서 보슬비가 떨어져 내렸다. 우산이 없어도 집까지 걸어갈 수 있을 정도라 다행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 길에 덩그러니 서있을 순 없다. 흠뻑 젖을 만큼 장대비가 내리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 우산을 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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