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내 이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Nov 20. 2018

한강 보이는 고층 오피스텔에 살고 싶어진 뜬금없는 이유

집꾸미기를 시작했다. 새로운 꿈이 생겼다.

  어느 정도 세상을 알 나이가 되었을 무렵, 그러니까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이루어준다'는 게 개수작임을 깨달았을 때부터 내겐 비현실적인 꿈이 없었다. 다이어트는 적성에 맞질 않으니 48kg의 꿈은 접고 현상유지만. 하루아침에 유명 작가가 될 실력은 없으니 취미로 브런치 글 연재만, 20대 문과생 마케터 주제에 부자 되는 건 꿈도 못 꾸겠고 연봉은 내 노동력이 아깝지 않을 정도만.


  사실 다른 것들이야 노력으로 해결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지. 많은 돈이 필요한 꿈들은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걸 아니까 품어볼 생각조차 하질 않았다. 카드 할부 보우하사 큰 맘먹고 지른 게 이어폰, 헤드폰, 스피커, 노트북 정도인데 이 정도도 나한텐 충분히 사치고 그랬다.


  그랬는데, 이번엔 되도 않는 꿈이 하나 생겼다.


뷰 좋은 10평 넘는 고층 오피스텔에 살고 싶어!

  대학생 때 3년 반 고시원 생활을 했다. 그중 첫 1년은 창문도 없는 1.5평짜리 방에서 보냈다. 밤이나 낮이나 일관되게 깜깜한 그곳에서 숨막힘에 치를 떨다 그다음 이사한 곳이 500에 43짜리 4평 다세대 원룸. 졸업하고 첫 직장을 다니는 동안 월세가 유난히 싸던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겨울엔 외풍에 떨고 여름엔 곰팡이에 소름돋다 잊을 만하면 바퀴벌레도 기어나오는 곳이었다.


  모두 합쳐 7년쯤 되는 시간 동안 내게 집은 발 뻗고 잠잘 수 있는 공간 그뿐이었다. 발을 뻗었다고 마음 편하게 쉴 수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침대 밖에서는 앉을 자리 하나 없는 고시원이 갑갑해서, 언제 바퀴벌레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원룸이 무서워서 눈뜬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밖에서 보내곤 했다.


  지금 2년 가까이 살고 있는 원룸은 1000에 55, 5평쯤 되는 오피스텔인데 3층이라 도로 위 차 소리가 시끄러운 거랑 맞은편 키 큰 건물들 때문에 하늘 보기 어렵다는 거 빼면 치명적인 단점은 없다. 단점은 무슨, 바퀴벌레 곰팡이 출몰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내가 처음으로 살아보는 집다운 집이다. 그치만 이사 올 때부터 옵션으로 있던 촌스러운 꽃무늬 옷장과 존재 이유를 알 수 없는 같은 무늬 컴퓨터 책상을 치울 엄두가 안 나 그냥저냥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채로 살았다.


  그랬는데 세 달 전, 한창 구직 중일 때 만난 회사 한 곳이 집 꾸미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면접을 봐야 하니 그 회사 앱을 깔아 평소엔 관심도 없던 인테리어 콘텐츠를 뒤졌다. 코딱지만 한 원룸 사는 나에겐 집꾸미기가 마냥 사치 같은 거였는데 세상에. 세상엔 생각보다 나만큼 좁은 방에 사는 동지가 많았고, 생각 이상으로 그 방을 잘 꾸며 사는 원룸 자취생들이 많았다.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는데…?' 싶었는데 면접에서 만난 COO분이 건넨 한 마디가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우리 회사의 목표는 집꾸미기에 관심이 없던 누군가가 조명 하나를 사 보는 거예요. 그거 하나로 집 분위기가 아늑해지는 걸 체감한 사람이라면 집꾸미기가 몇천만 원짜리 인테리어가 아니라 몇만 원, 아니 몇천 원으로도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될 거고요. 사람들이 집에서 좀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거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늑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던 내게 그 말은 새로운 기회를 보여 줬다. 더 행복한 시간을 만들 기회.



  면접 후 나는 그곳의 팀원이 아닌 충성 고객으로 함께하게 되었다. 처음엔 소소하게 침대 위치를 바꿔본 것뿐이었는데, 침대 옆에 책장을 둬서 파티션을 나눈 게 좋아 보여 따라 했더니 제법 근사해진 게 시작이었다. 보기 싫던 컴퓨터 책상을 드디어 치우고 빈자리는 전신거울 수납장과 행거로 채웠다. 화장실 옆엔 옷가지를 올려둘 선반을 두니 딱이었다. 수납이 잘 되니 방을 더 넓게 쓸 수 있게 되었다. 넓어진 공간엔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사이즈 맞는 작은 소파와 책상을 사 넣었다. 소파 앞엔 살포시 러그를 깔았다.


  그러자 집이 변했다. 씻고 자면 그만이었던 곳이 더 많은 시간을 뒹굴고 싶은 보금자리가 되었다. 여전히 꽃무늬 옷장이 떡하니 놓여 있는 좁디좁은 원룸이지만 조금은 내 취향으로 메워진 공간이다. 옷을 고를 때, 향수를 뿌릴 때, 하다못해 노트 한 권을 살 때도 그렇게 따지던 취향인데 하루 절반을 보내는 공간이 여지껏 내 취향 아니었다는 게 이제야 새삼스럽다. 맘에 쏙 드는 옷을 입은 날 괜히 뿌듯한 것처럼 집에서 뒹굴거리다 괜히 행복해지는 요즘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가구를 배치하다 보니 깨달은 바가 있다. 원룸 인테리어는 기-승-전-큰 창문이요, 원하는 형태로 집을 꾸미려면 적어도 10평은 넘어야 하겠다. 조용히 직방을 켜 본다. 한강은 개뿔 청계천도 안 보이는 동네 집이지만 전세가 1억 5천부터 시작한다. 대출을 받는다 쳐도 5천은 있어야겠는데… 음. 앞으로 한 5년쯤 치킨을 끊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건 가능한 게 아니잖아?



* 매주 수요일, 취향 가득 담긴 제 글을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매일매일 읽을거리]도 소소하게 운영 중이에요:)

매거진의 이전글 아무 것도 아닌 내가 우울한 날에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