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생활, 불타는 열정보다 꾸준한 애정이 필요합니다
"열정에 미친 사람을 찾습니다!"
"미치도록 재밌는 일을 함께할 사람을 찾습니다!"
"성장중인 로켓 스타트업에 올라탈 팀원을 모십니다!"
내 SNS 타임라인에 채용공고가 많이 뜬다. 죄다 스타트업인 걸 보니 타깃은 잘 잡았네. 콘텐츠 에디터, 콘텐츠 마케터, 퍼포먼스 마케터, 엔지니어 등 전 직군 채용중이란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 보면 열정과 에너지 넘칠 것을 필수 혹은 우대조건으로 삼는 곳들이 많다. 가끔 어딘가에 미친 사람을 환영한다는 곳도 보인다.
꼭 그래야 할까?
'워라밸',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가 회사를 고르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로 자리잡은 지 오래되었다. 워라밸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회사가 내 행복을 책임질 수 없는데 근무시간 이후는 내 것으로 챙기는 게 당연하다는 사람이 있을 거고, 내 인생에선 커리어가 가장 중요하니까 개인의 삶보다 일이 우선인 게 괜찮다는 사람도 있을 거다. 무엇 하나 틀리지 않은 말이다. 끄덕끄덕. 지금은 일이 너무 재밌어서 야근 좀 하고 싶다는 것 좋다. 끄덕끄덕. 하지만 그걸 회사가 직원에게 요구하면 안 되지. 절레절레.
스타트업은 일이 많다. 그 많은 일을 해치울 사람은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워라밸이 지켜지는 곳을 찾기 어렵다. 대신 수평적인 문화에서 자기 주도적으로 다양한 업무를 경험해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스타트업에 발을 들이는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모르면 안 될 상식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경미한 야근 정도는 열정으로 감수하고 입사한다. 좋아서 야근하러 온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서비스나 제품이 매력적이니까 회사는 성장할 거고, 그러면 좋은 팀원도 늘어서 야근할 일이 없게 될 거라 믿으며 어쩔 수 없이 고생하는 거다. 무릇 스타트업 C레벨들이란 그런 선량한 사람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회사가 크는 대로 업무환경을 개선해 주고 적절한 보상으로 치하해야 한다. 그럼 또 일할 맛이 날 거고. 열정의 선순환이다.
물론 현실은 아름답기 쉽지 않다. 일부 스타트업에서는 열정 가득한 직원들을 갈아넣으며 회사를 성장시키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아무리 일 좋아하고 성장 추구하는 사람이라도 매일같이 새벽에 퇴근하는 게 일상이 되면 이상해진다. 내 실력이 성장하는 건지 회사 매출만 성장하는 건지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문득 '내 안의 열정은 어딜 간 걸까' 현타가 온다. 열정? 있었는데,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없네. 멀리 갈 것도 없이 1년 전 내 이야기다.
회사들이 열정에 미친 사람을 찾는 건 그래서일까.
열정이 넘쳐 느리게 고갈되는 사람을 찾아 오랫동안 갈아넣겠다는 걸까.
내 전직장 같은 회사들은 사회 구석구석 독버섯마냥 자리잡고 있다. 화려해 보이지만 손대는 순간 내가 망가지는 나쁜 회사들. 똑똑하고 열정 넘치는 신입들을 뽑아 지칠 때까지 부리고 '개인의 성장이 곧 보상'이라며 뻘소리나 하는 곳들. 그 신입들이 열정을 하얗게 불태우고 퇴사하면 열정에 미친 새로운 신입들을 뽑는 그곳들. 잡플래닛 크레딧잡 블라인드에 각종 성토의 글이 3종세트로 올라와도 리뷰 물타기에 급급한 그 뭐같은 곳들. 그곳들의 유일한 장점이라고는 신입이 1년 정도 죽었다 생각하고 경력 쌓기 좋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1년 동안 반죽음 상태가 되기 십상인데 나만 해도 호흡곤란, 만성 두통, 우울 등을 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열정에 미쳐 있었던 것 같다. 존재감 없는 서비스 속 아무도 보지 않는 콘텐츠만 만들던 회사를 탈출해 광고 콘텐츠에 돈 펑펑 쓰는 회사를 만났으니 그럴 만했다. 이제야말로 내 능력을 보여줄 곳을 찾았다며 매일같이 자정 넘어 퇴근했었다. 업무성과가 눈에 보이니 신이 나서 더 매진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일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고 몸도 마음도 그새 많이 지쳤다. 그러다 정신차려 보니 입사동기들은 죄다 퇴사했고 나는 비슷한 일을 매번 같은 방법으로만 해치우는 기계가 되어 있었다. 내 열정은 이런 데 쓰라고 있던 게 아니었는데.
그때 탈탈 털어 써버린 미친 열정은 그곳을 그만두고 몇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열정도 지갑도 모두 빈털터리가 된 나는 경력증명서와 원천징수영수증, 일과 새로운 회사에 대한 작은 희망만 가지고 지금 회사에 합류했다. 면접 때 '업무강도가 세다, 버틸 수 있겠냐' 물어보지 않고 '어떤 콘텐츠를 만들어 봤고, 우리 회사에선 어떤 걸 만들고 싶냐'는 질문을 해준 팀원들 때문에 피어난 희망이었다. 그 작던 희망은 이제 애정으로 제법 자라 가끔 생기는 약간의 야근을 품어줄 정도가 되었다.
지금 회사에서 콘텐츠 마케팅을 한 지 10달쯤 지났다. 모나지 않게 섞여들어 나쁘지 않은 성과를 내고 있다. 회사 홍보 겸 개인 포트폴리오로 쓰고 있는 내 SNS 계정을 본 누군가에게는 내가 열정에 미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전혀 그렇지 않다. 전직장에서 모두 써버린 미친 열정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지금 나를 지탱하는 건 뜨거운 열정보다 미지근한 애정에 가깝다. 다들 열심히 일하는데 나도 힘을 보태고 싶다, 여기서 스스로 뿌듯해할 만한 작업물을 만들어가고 싶다는 애정.
물론 그 애정의 근원은 당연한 정시 퇴근이다.
* 매주 수요일, 취향 가득 담긴 제 글을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매일매일 읽을거리]도 소소하게 운영 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