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는 재능 있는 사람에게 온 전성기, 어쩌면 우리에게도
몇 주 전 엄청난 유튜브 영상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선릉역으로 오랬잖아
왜 신림역으로 가고 있어
넌
정말
길치
- 선릉역으로 (6:15)
하늘에 날린 아드레 날린
한 방에 날린 내 전재산 날린
묻고 더블로 가서 날린
그땐 내가 깡패가 되는 거야
마포대교는 뚫렸다
- 9:55, 곽철용의 숲
카피추. 이 곱게 미친 사람은 누구인가요. 어떻게 이런 근본이 있는 듯 전혀 없는 노래를 부르는 건가요. 산에서 내려와 세상 물정 모르고 욕심이 없(지만 강남 스벅에서 커피 마시는 모습이 포착됐)다는 흔해빠진 개그 설정까지도 그와 함께하니 그저 웃깁니다. 심지어 저런 곡이 끝도 없이 나와요. 창조의 밤 표절제로 시리즈는 벌써 4편이 공개되었는데 매 영상마다 미치고 폴짝 뛰는 곡이 몇 개씩이나 있습니다.
대체 어디서 이런 거물이 혜성같이 등장했는지 놀라던 차에 알 수 없는 유튜브 알고리즘은 저를 한 영상으로 인도합니다.
아니 이분, 그냥 뭐 선릉역 지나가다 갑자기 만든 곡이라더니 7년 전에도 얼굴에 철판 깔고 '선릉역으로'를 불렀네요. 웃긴 건 둘째치고 저게 뭐지? 싶어 당황하는 게스트들의 반응이 관전 포인트입니다. 슈퍼스타K 2에서 강승윤이 '본능적으로'를 부른 게 2010년인데 그쯤 해서 만들어 두었던 건가 봐요.
나무위키를 털어보니 카피추 추대엽 씨는 이런 음악 개그를 오래 해오셨더라고요. '짜증날 때 짜장면~ 우울할 때 울면~ 탕탕탕탕 탕수육~' 도 이 분이 만든 거였어요. MBC 공채 개그맨으로 공중파 방송에도 오래 나오셨고요. 찾아보니 예나 지금이나 개그감각은 출중하신데, 여태 시대도 환경도 그 개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엔 왔어요 전성기. 병맛이 참맛이 되어버린 지금, 유병재 씨와 찍은 케미 터지는 영상들은 수백만 수천만 조회수를 달성 중입니다.
얼마 전 샌드박스 계약도 마쳤다는 기사를 보았는데요. 알고 보니 데뷔 19년 차 개그맨이셨네요. 그 연륜에 한 번 놀랐고, 이런 재능이 19년이나 알려지지 않았다는 데 두 번 놀랐습니다. 하지만 왔어요. 멀리서도 결국 무사히 도착한 전성기! 이제야 알게 된 그를 저도 응원합니다. 그 덕에 작은 희망도 함께 얻었어요. 꾸준히 노력하는 재능 있는 사람에겐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게 될지 모른다고요.
나 정도면 괜찮은데 왜 괜찮은 상황은 오지 않을까. 부끄럽지만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힘든 일이 많던 올해는 자주 그랬어요. 그래도 오지 않을 것 같던 한 해의 끝이 보입니다. 어쩌면 그 너머에 기대하지 않았던 좋은 날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노력하고 있는데도 나만 뒤쳐졌나 싶을 땐 내가 시대를 앞선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자고요. 우리,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을 좋은 날을 같이 기다려봐요. 웃음이 필요할 땐 카피추 노래 들으면서요!
*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 19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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