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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Dec 19. 2019

멀리서도 결국엔 와버렸어요, 카피추 전성시대

노력하는 재능 있는 사람에게 온 전성기, 어쩌면 우리에게도

몇 주 전 엄청난 유튜브 영상을 발견했습니다.


카피추, 그 전설의 시작


내가 선릉역으로 오랬잖아
왜 신림역으로 가고 있어

정말
길치

- 선릉역으로 (6:15)
하늘에 날린 아드레 날린
한 방에 날린 내 전재산 날린
묻고 더블로 가서 날린
그땐 내가 깡패가 되는 거야

마포대교는 뚫렸다

- 9:55, 곽철용의 숲


  카피추. 이 곱게 미친 사람은 누구인가요. 어떻게 이런 근본이 있는 듯 전혀 없는 노래를 부르는 건가요. 산에서 내려와 세상 물정 모르고 욕심이 없(지만 강남 스벅에서 커피 마시는 모습이 포착됐)다는 흔해빠진 개그 설정까지도 그와 함께하니 그저 웃깁니다. 심지어 저런 곡이 끝도 없이 나와요. 창조의  표절제로 시리즈는 벌써 4편이 공개되었는데 매 영상마다 미치고 폴짝 뛰는 곡이 몇 개씩이나 있습니다.

  대체 어디서 이런 거물이 혜성같이 등장했는지 놀라던 차에 알 수 없는 유튜브 알고리즘은 저를  영상으로 인도합니다.


'선릉역으로' 2012년 버전


  아니 이분, 그냥 뭐 선릉역 지나가다 갑자기 만든 곡이라더니 7년 전에도 얼굴에 철판 깔고 '선릉역으로'를 불렀네요. 웃긴 건 둘째치고 저게 뭐지? 싶어 당황하는 게스트들의 반응이 관전 포인트입니다. 슈퍼스타K 2에서 강승윤이 '본능적으로'를 부른 게 2010년인데 그쯤 해서 만들어 두었던 건가 봐요.

  나무위키를 털어보니 카피추 추대엽 씨는 이런 음악 개그를 오래 해오셨더라고요. '짜증날 때 짜장면~ 우울할 때 울면~ 탕탕탕탕 탕수육~' 도 이 분이 만든 거였어요. MBC 공채 개그맨으로 공중파 방송에도 오래 나오셨고요. 찾아보니 예나 지금이나 개그감각은 출중하신데, 여태 시대도 환경도 그 개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엔 왔어요 전성기. 병맛이 참맛이 되어버린 지금, 유병재 씨와 찍은 케미 터지는 영상들은 수백만 수천만 조회수를 달성 중입니다.

  얼마 전 샌드박스 계약도 마쳤다는 기사를 보았는데요. 알고 보니 데뷔 19년 차 개그맨이셨네요. 그 연륜에 한 번 놀랐고, 이런 재능이 19년이나 알려지지 않았다는 데 두 번 놀랐습니다. 하지만 왔어요. 멀리서도 결국 무사히 도착한 전성기! 이제야 알게 된 그를 저도 응원합니다. 그 덕에 작은 희망도 함께 얻었어요. 꾸준히 노력하는 재능 있는 사람에겐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게 될지 모른다고요.

  나 정도면 괜찮은데 왜 괜찮은 상황은 오지 않을까. 부끄럽지만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힘든 일이 많던 올해는 자주 그랬어요. 그래도 오지 않을 것 같던 한 해의 끝이 보입니다. 어쩌면 그 너머에 기대하지 않았던 좋은 날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노력하고 있는데도 나만 뒤쳐졌나 싶을 땐 내가 시대를 앞선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자고요. 우리,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을 좋은 날을 같이 기다려봐요. 웃음이 필요할 땐 카피추 노래 들으면서요!


*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 19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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