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Dec 12. 2020

호구도 정신 번쩍 드는 순간

그 서점 탈덕 후기 ← 아마도

생활신조로 새길 만한 격언이 몇 가지 있다. 비 오는 날엔 빨래를 미뤄야 한다던가. 외출할 때 선크림을 발라야 한다던가. 2020년을 보내는 지금 그 격언에 하나를 추가하자면 역시, ‘인스타 광고는 믿고 걸러야 한다’. 발색 쩌는 틴트부터 스팀 청소기까지 눈 돌아가는 그 광고들에 홀리면 가성비를 논할 수조차 없는 제품을 받아보는 게 십중팔구다. 안 사요 안 사. 호구 성향 테스트에서도 ‘환불원정대 1열 선봉장 쌉가능’ 판정을 받은 인간 탈호구가 나란 말이다. 가성비, 최저가, 카드 할인까지 고려하지 않으면 내 장바구니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호구 되는 순간이 있다. 인스타 책 광고 발견했을 때. 줄거리 소개건, 만화로 그렸던, 문장 발췌던 눈에 띄는 대로 다 읽는다. 마음에 들면 뒤돌아보지 않고 산다. 그래, 사실 인스타 책 광고는 핑계다. 서점에서 보내는 광고메일도 다 받아보는데. 어떤 계기든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면 메인 배너 광고도 다 구경하고, 베스트셀러 목록도 살펴보고, 좋아하는 작가도 검색하면서 이참에 살 책들을 쓸어담는다. 그렇게 사는 책이 한달에 10만 원어치, 6개월이면 60만 원 이상이다.


초딩 때부터 거기서 책을 샀다. 없는 살림이래도 방학이면 엄마가 우르르 몇 권씩 사주곤 했다. 택배가 일주일 걸려 도착하던 시절이었다. 언제 오나 조마조마하다 연락을 받으면 30분 전부터 길목에서 택배 기사님을 기다리던 그때. 그때 참 좋은 책을 많이 읽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 <너도 하늘말나리야>, 빨간머리 앤 시리즈에 로알드 달의 거의 모든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대지>같은 명작도 밤 새며 봤다. 놀거리가 없던 시절 책이야말로 엄마가 허락한 유.일.한.마.약. 이었으니까.


책에 대한 환상도 그때 생겼다. 책이란 아무나 쓰지 못하는 것, 작가란 타고나는 사람, 서점은 곧 성지라고. 물론 환상이란 깨지라고 있는 거다. 나무한테 미안한 책들과 그런 책을 잘도 내는 작가들이 넘쳐나는 걸 이제는 안다. 그나마 끝까지 남았던 환상은 서점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내가 좋아했던 그 서점.


광화문 한복판에 거대한 서점을 내면서 “서울 한복판에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서점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했다던 창업주. 책을 한 곳에 오래 서서 읽는 것을 절대 말리지 말고 그냥 두라는 운영 지침. 마음에 드는 것뿐이었다. 돈 없던 대학생 시절 일주일에 한두 번은 광화문 그 서점에서 시간을 보냈다. 좋은 향기가 나고 언제든 앉아 쉴 의자가 많은 그곳은 정말로 성지였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경전 맨 첫장에 들어가야 할 문구다.


거기서 계속 책을 샀다. 이사를 하고 광화문이 멀어져도 온라인으로 꾸준히. 돈을 벌기 시작하고부터는 최고 멤버십 등급을 유지할 만큼. 가끔은 현타도 왔다. 새로운 온라인 서점이 속속 생기고, 그들이 더 예쁜 굿즈를 만들며 트렌디한 이미지를 가져가는 동안 그 서점의 온라인 매장은 전혀 바뀌질 않았다. 오프라인 매장이 암만 멋진들 매번 거기서 책을 살 순 없는데. 모바일 최적화 엉망이지, 앱은 툭하면 꺼지고 오류가 나지. 그래도 좋은 추억 하나 보고 거길 썼다 내가. 그러다 나같은 호구가 정신 번쩍 드는 순간이 생겼는데, 여느 때처럼 서점 배너 광고를 보던 엊그제였다.



함량 미달 카피는 그래, 바쁘면 그럴 수 있지. 그치만 ‘될 꺼야’는 못 참겠다. 꺼야라니! 다른 데서 봤다면 웃고 지나쳤을 거다. 저긴 서점인데. 서점에서 저런 기본적인 맞춤법을 틀리는 게 말이 되나. 차라리 오타였다면, ‘ㅇ벗다’ 처럼 실수인 게 뻔한 오타였다면 1:1 문의 게시판에 제보라도 했을 거다. 그런데 저건 너무했다. 서점, 좋은 글과 가장 가까워야 할 곳에서 이게 다 뭔가.

귓가에 노래 하나가 맴돈다.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이것은 호구의 작별 인사.


안녕. 내 인생의 절반 넘게 함께한 친구였는데. 그쪽은 내 존재도 몰랐겠지만 나는 너를 참 좋아했어. 여전히 광화문이며 강남의 오프라인 매장은 좋아하겠지만, 자꾸 꺼지는 그 앱에서까지 호구처럼 책을 쓸어담진 않을 거야. 꺼야가 뭐니 꺼야가. 며칠 살펴봤는데 바꿀 기미도 없더만. 그 서점에선 아무도 맞춤법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나 봐. 너희 가끔 책도 내더만. 편집 매뉴얼도 팔지 않니. 하긴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안녕안녕.


탈덕 후기는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다.

그래, 내년부터는 알라딘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