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집에서 6.4km, 콘서트장
세상은 넓고 취향은 다양하다. 좋아하는 것뿐일까, 싫어하는 것도 모두 다른 게 당연하다. 내가 먼 데 가는 여행을 꺼리듯 콘서트를 즐기지 않는 사람도 있을 거다. 음악 듣는 걸 좋아해도 콘서트는 싫어할 수 있다. 2시간을 꼼짝 않아야 하는 게 답답하다거나 사람 많은 게 불편하다거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혹시라도 ‘CD랑 똑같은 걸 콘서트까지 가서 들어야 할까’ 싶어서라면 한번쯤 권하고 싶은 게 있다. 재즈 공연이다. 물론 재즈를 좋아하는 분에게만!
층간소음이 심할 때, 기분이 가라앉을 때, 가사 있는 곡이 부담스러울 때 종종 재즈를 틀어놨었다. 듣다 보니 좋아져서 더 찾게 되었다. 그때 윤석철 트리오를 알게 되었다. 윤석철의 음악은 잔잔하다가도 톡톡 튀고, 그만이 보여주는 따뜻한 세계가 있어서 좋았다. 몇 년 동안 페스티벌이나 재즈바에서 마주하면 나 혼자 내적 친밀감을 느끼는 사이. 그런 그들이 이번에 EP 앨범을 내고 단독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재즈에 국악을 끼얹은 그 앨범이 좋았던 터라 이건 가야 해! 싶었다. 운좋게 정중앙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재즈는 같은 곡이라도 연주마다 달라진다. 재즈 공연을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윤석철은 그랬다. 내가 매일 같은 옷을 입지 않는 것처럼 공연마다 다른 색깔의 연주가 이어지는데 이게 재밌다. 모든 스타일이 잘 어울려서 만날 때마다 기대되는 그런 연주. 그렇다고 새로움에만 집중하는 것도 아니다. 박자를 틀리거나 건반을 하나 더 누르는 실수 따위 없는 프로들이다. 첫 앨범이 2009년에 나왔으니 당연한 말일까, 아무튼 마음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노련함이 있다.
최저시급 받던 시기를 지나 약간의 여윳돈이 생기고부터는 공연을 보러 다녔다. 코로나 전까지는 봄 여름 가을 락페스티벌도 챙겨 다녔다. 떼창도 하고, 몸통박치기도 하고, 춤도 추면서 흥을 발산하는 공연들. 그런 공연에 갈 땐 아티스트들의 셋리스트를 확인하며 히트곡을 한 번씩 더 듣는다. 전날 잠도 일찍 자고 비타민도 더 챙겨먹는다. 오늘 불태워야지! 떼창도 할 거다! 하지만 재즈 공연에는 특별한 준비를 하지 않는다. 흐느적거리며 출발해서 느긋하게 자리에 앉는 게 전부다.
락과 재즈는 즐기는 방식이 다르다. 전문지식 없이 그저 듣는 내 경우인데, 락 공연에서는 오매불망 최애곡의 쩌는 파트를 기다리지만 재즈 공연에선 놓치면 큰일날 파트가 없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악기별 솔로 연주도 있지만 이 또한 기대하지 않았을 때 등장하더라. 아마도 곡 자체가 기승전결이 확실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재즈가 지루하다는 사람들 마음도 충분히 알 것 같다.
나는 재즈의 우연하게 계속되는 멜로디를 아무 생각 없이 듣는 걸 좋아한다. 아는 곡이라도 매순간 달라지니까 어디가 달라졌는지 귀를 쫑긋하는 게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집중력의 한계, 나는 곧 음악을 흘려 듣는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연주를 들으며 떠오르는 다양한 장면을 바라본다. 잊고 있던 기억을 건질 때도, 새로운 발상이 떠오르는 때도 있다. 이건 글로 써야지 기억해두자 마음먹어도 소용없다. 공연이 끝나면 모두 날아가버린다.
이날 공연에서는 징과 깽과리 소리가 한몫했다. 전래동화 세계에 놀러간 힙스터가 되어 호랑이와 토끼 사이를 거닐었다. 시작은 옛날 옛적, 끝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정해져 있는 세계. 이야기 속 희노애락에 감동하면 그걸로 충분한 곳. 왠지 10년 전쯤 좋아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해라. 그 운명이 어떻게 이어져 있든 우리는 그걸 긍정해야 한다. 어딘가 트로트 느낌이 나는 흐름에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가 떠오른 걸까.
그저 버티던 삶에 즐길거리가 하나씩 생길 때부터, 오래 살고 싶어졌다. 하지만 생명이란 시작이 그랬듯 끝 또한 예상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 시무룩해졌다. 우울함을 떨치려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할 어려운 책도 읽었다. <지상의 양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읽다 덮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까지. 읽고 남은 건 ‘오늘 하루가 영원히 반복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멋지게 살자'. 자기계발서에 어울릴 듯한 문장 하나뿐이었다.
반복되는 멜로디가 그 문장을 살포시 덮었다. 태어남과 죽음이 정해져 있다면, 내가 만들 수 있는 건 그 사이 짧은 공연이라면, 나는 재즈를 연주해야지. 피아노랑 드럼이랑 베이스 트리오도 좋겠다. 같은 주제를 향하는 곡에 기분따라 다른 옷을 입혀 가며. 내킬 때는 멋진 솔로 파트를 풀어 내며. 끝도 시작도 없이 빠져드는 그런 연주를 해야지. 끝나면 모두 의미없을 순간들도 알록달록 즐겁게 펼쳐놓아야지.
1분 1초가 느긋했던 연주, 90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손바닥이 발개지도록 박수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