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을 외워

#4. 집에서 3.8km, 홍대 공연장

by 여름

회사 다니는 재미 중 하나. 동료들의 숨은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다. 매주 수요일 익명 에세이를 보내는 아마추어 작가, 매일 야근하면서도 사이드 프로젝트로 큰돈을 벌어들이는 일잘러, 주말마다 하이볼을 만드는 바텐더, 그리고 지금 소개할 H님. 우리 회사에는 뮤지션이 있다. H님은 몇 년째 활동 중인 헤비메탈 밴드의 보컬리스트다.


공연하면 꼭 갈게요! 약속하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분의 공연 소식이 회사 잡담 채널에 올라왔다. 냅다 티켓을 예매했다. 홍대 클럽을 대관해 여러 헤비메탈 팀이 한꺼번에 무대에 서는 자리였다. H님의 공연은 가장 첫 번째 순서였다. 헤비메탈은 처음이라 조금 걱정되었지만 첫 번째 무대라 마음이 편했다. 너무 귀 아프면 H님 공연만 보고 슬쩍 나와야지.


대망의 공연날. 20년 전부터 한결같았을 레트로 감성의 간판,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입구 계단을 내려와 지하 공연장에 도착했다. 허리 받칠 데 없는 바 의자들이 그곳의 어둑한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홍대 힙스터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H님의 음악은 몇 번 들은 적 있다. 나보다 락에 조예가 깊은 최측근이 감탄할 만큼 실력 있는 밴드였는데 라이브도 출중했다. 시종일관 쉬지 않고 내달리는 멜로디에 놀랐다. 아니, 회사에서 매출 대시보드와 LTV 예측 모델을 만드는 H님은 어디 갔지? 조곤조곤 데이터 분석 과정을 설명해주던 H님은 그곳에 없었다. 오직 헤드뱅잉을 완벽 소화하는 락커가 있을 뿐. 마스크를 써서 다행이었다.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H님의 팀만 보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공연이 너무 재밌었다. 세상 처음 와본 자리라 이대로 돌아가기 아쉬웠다. 3시간 동안 다섯 팀 공연을 내리 봤다. 여태 즐겼던 재즈 공연, 락 페스티벌과는 전혀 달랐다. 다른 생각할 틈 없이 밴드가 내뿜는 에너지에 압도되었다. 신기한 건 그렇게 집중했는데 가사를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는 거다. 몇몇 영어단어가 유추될 뿐. 심지어 어떤 팀의 음악은 30분 내내 돼지가 꿀꿀, 닭이 꽤애액 우는 소리처럼 들릴 따름이었다.


공연장을 나와 먹먹한 귀를 진정시키려 경의선 숲길을 걸었다. 산책 나온 귀여운 강아지들을 보며 문화 충격을 잠재웠다. 이해할 수 없는 가사, 그 안에 담긴 에너지, 엄청난 소리를 내지르며 승모근을 돌리고 점프를 하던 그들의 모습이 생생했다. 그들이 외던 가사는 감정을 끌어올리기 위한 주문이 아니었을까? 내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분노를 폭발시키는 주문. 출근길에 9호선 급행 타는 자의 고통! 점심 회의의 치욕! 야근의 절망! 그런 것들을 모조리 소환해 불태우는 음악, 그것이 헤비메탈.


다음날 내 출근길 플레이리스트에 AC/DC의 명곡들이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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