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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위로를 할 수 있으려면

척추가 곧은 사람, 해주님 이야기

by 여름

해주님은 회사에서 처음 만났다. 바쁜 일정에도 놓치는 일 하나 없고, 어딘가 여유까지 느껴지는 모습에 눈길이 갔다. 나중에 운동을 좋아한단 걸 알게 되고는 끄덕끄덕했다. 그 끈기와 여유는 코어 근육에서 나오는 거였구나.


그 근육을 만들어온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해주님의 새로운 회사 출근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은 이야기라 인터뷰로 풀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해주님께 정식으로 인터뷰를 요청한 건 그로부터 3달 후였다.




여름: 해주님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한 게 벌써 3달 전이더라고요. 시간이 빨리 가는 건지, 제가 행동이 느린 건지 모르겠어요. 한편 해주님은 계획을 세워서 착착 해내는 걸 잘하죠. 같이 일할 때도 실행력이 참 좋다고 생각했어요.


해주: 그런가요? 저 스스로 실행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그런 얘기를 종종 듣긴 하더라고요. 어쩌면 이건 호불호가 강한 사람의 기질인 것 같기도 해요.


여름: 호불호요?


해주: 저는 좋아하는 일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하는데,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일은 ‘그래도 한번 해 볼까’ 생각하기보다 시작할 마음 자체를 먹지 않는 편이에요. 개인적으로는 고민이 되는 부분이에요. 내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맘 먹고 해 보면 나한테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잖아요.


저는 언제나 모든 것이 통제 범위 안에 있길 바라는 사람이에요. 이걸 다르게 말하면, 내가 안정적으로 잘할 수 있는 것들만 골라 한다는 거거든요. 어쩌면 실패할 일을 아예 피하는 것일지도요. 누군가는 제가 이것저것 빨리 실행하니까 도전적인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여름: 실행력과 도전정신은 별개의 것이다,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이네요.


해주: 실패를 감수하고 내가 못 하는 걸 도전하는 게 어려운 것 같아요. 저 진짜 지는 것, 실패하는 것 싫어하거든요. 남들한테 욕먹는 것도 정말 싫어하고요. 근데 ‘살면서 내가 잘하는 것만 할 수 없겠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그때부터 생각하고 있어요. 하기 싫은 일이라도 ‘한 번 부딪혀볼까’ 생각하는 사람, 자기 인생에 찾아오는 우연을 기회로 생각하고 부딪혀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너무 무겁게만 내 인생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한테 주어진 운명이 있는 것처럼요.”


여름: 그 깨달음을 어느 순간 얻었는지 기억나요?


해주: 2019년 초반에 친구가 추천해 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책을 읽었어요. 읽고 나서 느낀 게 ‘내가 인생을 너무 무겁게만 봤다’였어요.


저는 항상 무언가가 딱 맞게 정해져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어요. 우연의 것들이 내 삶에 들어오는 게 너무 벅차게 느껴졌고요. 그런데 책을 보면 인생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와요. 우연의 것들이 등장하더라도 굉장히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캐릭터들요.


제가 책 속의 철학을 온전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만약에 인생이 똑같이 반복된다면 나는 그걸 어떻게 바라볼까. 인생을 무겁게만 생각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인생에서 주어지는 우연한 것들에 유연하게 대처할 사람이 될 것인가 스스로 물어보게 되더라고요. 그전까지는 내가 너무 무겁게만 인생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한테 주어진 운명이나 내가 꼭 해야 하는 숙명이 있는 것처럼요.



“우연을 마주했을 때 버거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해주: 저는 중학교 때부터 항상 스포츠 관련 일을 하고 싶었어요. ‘나는 스포츠 분야에서 공익을 실현하는 사람이 될 거야. 그게 내 운명이고, 나는 그러기 위해서 태어났어.’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도 ‘나는 축구 관련 스포츠 일을 할 거니까' 스페인어를 전공했고, 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스페인어과를 갔죠. 한 번도 그 외의 것들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근데 그러다 보니까, 스포츠와 관련 없는 다른 기회들은 다 쳐냈어요. ‘나는 이게 필요 없어. 나는 이런 일을 할 거니까 이것과 상관없는 건 안 하고 싶어.’ 그런 사람이었는데.


여름: 그랬는데?


해주: 그 책을 읽고 약간 띵했어요. 내가 너무 갇힌 생각을 한 것 같아서요. 내 인생은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는 운명적인 것이라고 무겁게만 생각했는데. 정작 그게 내 운명이 아닐 수도 있고, 살면서 분명히 다양한 기회들이 있었을 텐데 그것들을 유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여름: 그런데 왜 스포츠였나요. 뭔가 계기가 있었나요?


해주: 동생이 운동을 오래 했어요. 축구 선수 출신이에요. 3살 어린 동생이 초등학교 때부터 선수의 길을 밟아왔고, 그 모습을 보면서 시스템에 구조적인 결함을 많이 느꼈어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가 돌아갈지 어렸을 때부터 고민했어요. 그 시작은 ‘내 동생이 어떻게 하면 좋은 선수로 잘 클 수 있을까’였고요.


여름: 이런 좋은 누나가.


해주: 그래서 성인 리그보다도 유소년 리그의 육성 시스템에 관심이 많았어요. 좋은 선수를 발굴하고, 그 선수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행정가라던지 에이전트가 되고 싶었는데 어렵더라고요.


제가 더 열심히 잘했다면 지금도 그 길을 걷고 있었겠지만, 글쎄요.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봤거든요. 그때 그 일이 제가 원하던 성격의 일이 아닐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은 ‘어떻게 하면 이 선수의 몸값을 높일 수 있을까’ 고민하는 분들이더라고요. 저랑 생각하는 방향이 달랐던 거죠. 애초에 선수들도 에이전트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자기의 몸값을 올려주는 것이고요.


그런 부분에서 현타를 느끼고, 마지막으로 부딪혀보자 했던 게 대한체육회에서 일하는 것이었어요. 제가 올림픽이나 월드컵 관련 업무를 하고 싶어 했거든요. 그래서 지원했고, 붙었고, 일을 해 봤고, 안 맞더라고요. 빠르게 포기. 이게 여름님이랑 일하기 바로 직전이니까 2021년 6월부터 10월까지의 일이네요.


여름: 어쩌면 책을 읽은 타이밍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요. 인생을 유연하게 살아보자는 생각을 한 다음, 오래 가져온 목표가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어서. 그래서 나에게 맞는 방향을 빠르게 다시 찾지 않았을까요.


해주: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항상, 인생의 우연한 것들을 마주했을 때 버거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모든 게 통제의 범위에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제가 더 편안해질 것 같아요.



“축구를 시작한 계기도 그런 거였어요. 내가 못 하는 것을 해 보자.”


해주: 저 운동 정말 좋아하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줄넘기나 배드민턴, 학교에서 하는 것들은 항상 금상을 타고 1등을 하고 그랬어요. 계주도 항상 4번 주자였고, 육상은 시 대회랑 도 대회도 나갔어요. 학교에서 제일 잘 달렸으니까.


그런 경험이 있으니 잘하는 운동만 계속해온 거죠. 축구는 심지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운동이에요. 그래서 일단 시작하면 잘하고 싶고 잘해야 하는데, 제대로 해본 적 없으니 못할 게 당연하니까 안 했던 거죠. 내가 못 하는 게 싫어서.


그 생각을 극복하기 위한 도전으로 축구를 선택했어요. 한번 해보자, 나는 지금 처음 해보는 거야, 못 할 수도 있어, 합리화를 하면서요.


그리고 시작했는데, 정말 못하더라고요. 각오를 했는데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네다섯 달 계속해도 늘지 않고, 우리 팀 다른 사람들은 오래 축구를 해온 만큼 나보다 훨씬 잘하고. ‘난 왜 이렇게 못 해’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경기도 안 뛰고 싶고. 숨고 싶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님이 계속 뛰라고 하고, 나를 집어넣고 하니까 조금씩 그걸 극복하는 중이죠.



“내가 못 해 봐야,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위로해 줄 수 있다고.”


여름: 여기서 이영표 씨가 나오나요.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 해주님이 축구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서 일어난 일이었나요?


해주: 반년 정도 지났을 때였던 것 같아요. 6개월이면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을 만도 한데 여전히 어렵더라고요. 그때 <골 때리는 그녀들>, 골때녀 팀에서 저희 쪽에 연습 경기를 제안했어요.


그때가 연습 게임이었으니까, 모두 한 번씩 승부차기를 하게 됐어요. 어차피 연습 경기니까 모두 차 보게 해주겠다고요. 저희 감독님이 “가서 해주도 차” 하셨단 말이죠. 근데.


여름: 근데?


해주: 근데 다들 너무 잘 차요. 저는 그때가 승부차기를 처음 차는 거였어요. 승부차기 연습도 많이 하지 않았고요. 그래서 안 하겠다고 했는데, 그 목소리를 골때녀 팀의 이영표 선수가 들은 거예요. “지금 안 하겠다고 한 사람 누구냐, 내가 공 받아줄 테니 나와라”고.


그전에는 각 팀의 골키퍼가 공을 받았는데, 갑자기 이영표 선수가 나와서 저한테 자기가 받을 테니까 차 보라고 하는 거에요. 저 못해요, 못하겠어요, 했는데 빨리 나오라고. 그런데 막상 나가서 한 번 차 보니까 생각보다 괜찮더라고요. 연습한 대로 찼어요.


그러고 나서 이영표 선수한테 사인받는데 이렇게 얘기하시는 거예요. 내가 못해 봐야, 다른 사람 때문에 팀이 졌을 때 그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다고. 안 그러면 그 사람을 탓하게만 된다고.


여름: 세상에. 다시 들어도 너무 멋있는 얘기다.


해주: 나 때문에 팀이 져본 적 없다면, ‘그럴 수 있지’ 라는 생각을 못 할 수도 있잖아요.


여름: 맞아요.


해주: 그런 경험들을 계속해 나가야 이렇게 갇힌 생각들을 하나씩 풀어나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여름: 진짜로.



“무언가를 해내는 것, 비결이라기보다는 습관 같아요.”


여름: 해주님이 저보다 6살 어리잖아요. 그런데도 해주님이 더 어른 같아요. 저는 아직도 무언가 극복해야겠다거나, 더 나아가야겠다거나, 그런 생각을 못 한단 말이죠. 그런 생각을 하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어릴 때부터 운동을 하면 척추가 더 곧게 자라나?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비결이 있을까요?


해주: 글쎄요.


여름: 뭘까.


해주: 어떻게 보면, 어렸을 때부터 한 방향만 보고 나아가던 태도가 습관이 되어서인 것 같아요. 제가 극복하려고 하는 모습이기도 하지만요.


그러니까, 저는 ‘스포츠 관련 일을 할 거야’ 외에 인생의 다른 변수를 생각해 본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것만 보고 한 10년을 달려왔단 말이에요. 그걸 포기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살아보니까, 내가 어떻게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고 원동력을 만들어내는지 어렸을 때부터 학습이 된 것 같아요. 내 목표가 이거니까, 이런 것들을 해야 해, 그러려면 이걸 먼저 해야 해. 한 방향을 보고 내 인생을 정렬하면서 스스로 계획을 세우는 게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 되지 않았을까요. 뭔가 비결이라기보다는 습관인 것 같아요. 그러지 않으면 되게 불안하고요. 그 불안감은 제가 차차 극복해야 하는 거고요.


여름: 불안은 극복해야 한다지만, 해주님의 생활 태도는 그대로 멋지네요.


해주: 비록 10년의 꿈을 저버리긴 했지만, 저의 동기부여나 원동력을 스스로 알게 되었으니 그런 부분은 고맙게 느껴져요. 그 시간들이 헛됐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20살은 옛날에 넘었다. 이제 어른이 된다는 건 나이와 상관없다는 걸 안다. 해주님은 나보다 일찍 어른이 된 사람이다. 인생을 대하는 그런 태도는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인터뷰를 핑계로 들은 3시간 이야기만으로는 모두 알아낼 수 없었다.


이건 앞으로 해주님을 더 만나면서 살펴봐야지. 해주님이 어떤 생각을 해나갈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궁금하다. 멋진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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