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속보) 여름 퇴사! 그 이후
처음 이야기가 나온 건 수요일, 퇴사가 정해진 건 금요일, 퇴사일은 그다음 화요일이었다. 사흘 동안 열 잔 넘는 커피를 마셨다. 쓰지 않은 명함을 박스째 버렸다. 발받침과 허리받침은 두고 왔다. 함께 커피를 마신 동료들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마중 나왔다. 꽃다발과 선물을 안고 집에 돌아왔다. 그게 마지막 퇴근길이었다.
갑자기 백수가 된 게 슬프지만은 않았다. 지난 2년 동안 조금씩 지쳐 있었다. 잔뜩 쌓인 일이 사라지자 마음 한구석이 후련했다. 그 일을 넘겨받게 될 동료들에겐 미안했지만, 내가 그만둔 게 아니고 회사에서 그만 하라는데 뭐. 퇴직금도 있고 실업급여도 있으니 갑자기 나앉을 일은 없겠다 싶었다. 문제는 내가 백수 된 걸 어떻게 알릴지였다.
나는 마케터고, 내 회사를 위한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2년 동안 좋다고 소문내던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나온 셈이었다. 좋다던 회사 왜 나왔는지, 당분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설명해야 할 거였다. 그중에서 누군가는 "괜찮아? 진짜? 하루아침에 잘렸는데 괜찮을 수가 있어? 괜찮은 척 안 해도 돼..." 라며 위로할 것 같았다. 이미 결정된 일을 되돌아보며 고통받고 싶지 않았다. 부랴부랴 다른 회사에 입사할 생각도 없었다. 이왕 백수가 된 거, 당당하고 행복한 백수가 되는 걸 목표로 정했다.
퇴사가 결정되자마자 글을 한 편 썼다. 브런치, 인스타그램, 링크드인, 나를 아는 사람들이 있는 모든 곳에 대문짝만하게 소문을 냈다. 저 퇴사했어요, 많이 물어보실 것들 미리 답해드립니다, 부탁이니 '괜찮으세요?'라고 묻지 말아주세요!
Q. 퇴사? 갑자기? 왜요?!
제가 잘할 수 있는 일과 회사가 잘하길 바라는 일이 달라졌어요.
Q.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저는 글 쓰는 걸 좋아해요. 다양한 회사에서 7년 넘게 일하며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왔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특히 회사에서는 진정성 가득한 글, 다 읽고 나서 ‘이 회사랑 제품은 믿을 만한데? 좀 멋있다?’라는 생각이 드는 글을 계속 쓰고 싶어요. 한편 시선이 꽂히는 카피, 바로 돈을 벌어오는 광고 메시지는 제 전문이 아니에요.
여태까지는 제가 잘 쓸 수 있는 글이 회사에서도 필요한 글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고객을 직접 데려올 수 있는 글이 더 중요하게 되었어요.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회사에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되었으니 논의가 필요했어요.
제가 프로모션용 카피를 더 잘 쓰도록 노력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제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 확실한 만큼 여기에 집중할 곳을 찾는 게 맞겠다 싶었어요. 2년 가까이 회사의 성장에 기여했다고, 일 잘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지금 나가야 회사도 나도 서로 응원할 수 있겠다 싶고요. 경영진에서도 이해해 주신 덕분에 이야기를 잘 마쳤습니다.
Q. 괜찮으세요?
빠르게 괜찮아지고 있어요. 앞으로 뭘 할지 정하고 나온 게 아니라서 조금 불안하죠. 하지만 최측근의 전폭적인 지지와 실업급여, 여태 쌓아온 커리어가 있으니 몇 달쯤은 걱정 없이 쉬어도 될 것 같아요. 소식 가장 먼저 들은 회사 친구들이 응원 가득 용기 잔뜩 주셨어요. 그동안 회사 잘 다녔구나… 싶어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그 와중에 설마 “그래도 힘들 텐데… 요즘 취직 잘 안된다던데…”라고 자존심을 깎아내릴 분은 내 친구 중에 없겠죠!
Q. 일은 언제부터 다시 하려고요?
저 4대보험 꼬박꼬박 냈거든요, 실업급여 탈 자격 있죠! 거기다 소설 쓰기 수업이 금요일 오전 11시에 있어요. 4월이 되어야 끝나니까 적어도 그때까지는 취직 생각 안 하려고요.
그다음엔 천천히 여러 회사를 살피고 싶어요.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제대로 할 회사를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프리랜서로 글 쓰는 일도 해보고 싶으니,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 좋은 회사를 찾아보려고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곳으로요.
자극적인 제목,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 솔직한 내용을 갖춘 이 글은 친구들 사이에서 널리널리 퍼졌다. 콘텐츠 마케터로서 뿌듯함이 차올랐다. '좋아요' 찍히는 걸 보니 친한 친구 중 SNS 하는 사람이라면 다 본 듯했다. 반가운 연락들을 받았고 약속이 잔뜩 잡혔다.
그렇게 만난 친구들은 놀라울 만큼 내 걱정을 하지 않았다. 내가 퇴사한 건 우리가 만날 핑계일 뿐이었다. 잘했다고, 푹 쉬라는 응원을 건넸다. 몇몇은 푹 쉬고 같이 재밌는 일 해보자는 제안을 줬다. 제안이 구체화되는 일은 없었지만 그것만으로 힘이 되었다. 굶어 죽진 않겠다 싶어 위로가 됐다. 지금 보니 내 걱정 나만 하는 것 같은데, 나도 안 해야지.
백수생활이 우울하지 않다는 걸 소문내고 싶어졌다. 내 인생에 가장 여유로운 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글을 남기기로 했다. 대책 없어도 밝은 이야기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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