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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y 17. 2023

오늘 퇴직금이 들어왔다

#2. 3천만원과 ASAP 없는 세계

퇴사 축하한다며 밥을 사준다는 선배와 친구들을 만났다. 몇 년 만에 보는 얼굴들인지 모르겠다. 나의 퇴사는 만남의 계기일 뿐이어서 다행이었다. 너야 알아서 잘 먹고 살겠지, 하고 자연스레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실업급여 받는 게 어떤 뜻인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캐묻지 않았다. 이 편안한 분위기가 좋아 내 앞에 콜라를 홀짝이며 얘기를 듣는데, 질문 세례가 결혼을 준비한다는 친구를 향했다. 모은 돈이 있네 없네 하길래 솔깃해서 물어봤다.


“결혼하는 데 돈이 얼마나 들길래요?”

“결혼에 돈이 많이 든다기보다, 결혼 전에 돈 모으는 습관을 미리 들여야 한다는 얘기지. 우리 나이면 어느 정도 모아뒀을 돈이 있잖아. 너도 3천만원은 있지?”

“어… 디 보자. 이번에 퇴직금이랑 실업급여 받으면 간당간당하게 될 것 같아요!”

“야, 너도 참…”


언제든지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못 모으게 되더라구요, 개미 목소리로 변명을 덧붙이는 나 자신이 민망해 웃어넘겼다. 한심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동안 내가 일해온 스타트업 업계에는 돈이 계속 풀렸다. 멋진 글로 회사랑 제품을 알리는 자리도 적지만 분명히 있었다. 그런 글 내가 잘 쓰니까, 내가 필요한 회사로 요리조리 옮겨 다니면 앞으로도 별 탈 없이 커리어가 이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상황이 항상 좋은 건 아니었다. 경기가 얼어붙고 매출이 중요해지는 시점에 가장 먼저 사라지는 건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자리였다. 그렇게 나도 8년 만에 비자발적으로 나라의 도움을 받는 백수가 되었다.


이대로 살면 되려나, 괜찮겠지 뭐, 파도의 흐름에 몸을 맡기다 망망대해에서 가야 할 곳을 잃었다. 퇴사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온갖 분노와 허탈함과 서운함이 밀려왔다. 그런데 퇴사하고 2주가 지난 지금은 차라리 상쾌하다. 길을 잃은 대신 내 맘대로 나아갈 자유가 생겼다. 몇 달을 받을 수 있는 실업급여, 몇 달을 버틸 수 있는 퇴직금이 준 소중한 자유. 이걸 쓰면 나는 다시 내 나이에 3천만원도 없는 사람이 된다.




백수가 되니 아침부터 출근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은 뭘 할까, 잠깐 고민하다 조금 먼 동네 서점에 갔다. 시인이 운영하는 곳인데 아담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좋아 근처에 올 때면 들르곤 한다.


그리고 혹시, 지난번 왔을 땐 계시지 않았는데, 두리번거리다 나 혼자 반가운 얼굴을 마주했다. 세상에! 서점 주인분 맞네! 시인의 책을 뽑아들고 계산대에서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저 혹시… 시인님이세요?”

“네 맞습니다.”

“와! 혹시 괜찮으시다면 사인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무언가를 찾던 시인은 잠시 사라졌다 이내 만년필을 들고 돌아오셨다. 내 이름을 물어보시고는 작은 메모장에 먼저 받아쓰셨는데, 받침이 있는지 없는지 헷갈리기 쉬운 이름을 한 번에 옳게 적으셨다. 이름 확인을 마치고는 책을 펼쳐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이라는 제목에 어울리는 문장까지 함께 남겨 주셨다. 이 순간만은 팬사인회 온 아이돌 팬이 부럽지 않았다.


좋다고 방방 뛰며 집으로 가는 길, 한가한 평일 낮 버스를 타며 시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인을 청하는 손님을 위해 자신의 만년필을 가져오신 것, 이름을 꼼꼼히 확인하신 것, 사인에 정성스런 문장까지 더해 주신 것, 모두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급할 것 없이 정성이 우러났다. 그 여유, 내가 오랫동안 살아왔던 ASAP의 세계에는 희박한 것이었다.


ASAP, 최대한 빨리, 이거 오늘까지 해주실 수 있나요? 이 아젠다 내일 중으로 미팅 가능한가요? 듣고 싶지도 하고 싶지도 않던 재촉이 밤낮으로 가득하던 세계. 눈앞에 펼쳐진 일들을 해치우는 것도 모자란 시간에 여유며 정성은 사치였다. 내가 더 노력해야 했을까,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해볼 여유도 없이 2년이 지나갔다. 매일 일에 파묻혀 지냈는데 시인의 사인 한 장만큼 정성을 들인 순간이 드물다.


어쩌다 보니 하루아침에 그 세계에서 튕겨나온 나. 3천만원은 없지만 여유는 잔뜩 있다. 이번 백수 생활에 그 여유를 정성으로 쏟는 걸 배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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