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굴양 마흔일기
아침부터 마음이 무거운 날이었다. 아이를 겨우 등원 시키고 들어와 한숨 돌리려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잔뜩 속이 상한 엄마 전화를 받아 아침에 있던 일들을 나눴는데 통화를 마치고 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런 날이 있다.
덤덤하게 해야 할 일들을 해내다가도 명치끝이 뜨거워지며 가슴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날.
다양하게 핑계를 대본다. 아이의 짧은 방학과 일정이 많은 연말이 맞물려 피곤했고, 감기는 2주째 떨어지지 않는다. 사실 즐거운 일이 많지 않은데 얇은 주머니를 털어 이것저것 챙기고 나니 허전한 거실에 앉아 파도처럼 밀려오는 공허함에 마음이 도망칠 곳 없이 부딪혀버렸다.
가슴이 얼얼한 채로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복잡한 심경을 쏟아부었다. 우리의 단톡방에는 종종 각자의 하소연이 쓰레기통처럼 퍼부어진다. 내가 버거운 날엔 단톡방을 좀 늦게 확인하고, 안타까운 일들엔 같이 욕도 하고 자잘한 커피 쿠폰을 남발하며 바닥난 에너지를 긁어 모은다.
단톡방에서 한참을 떠들다 혼자 엉엉 울다를 반복했더니 오전이 지났다. 마음은 후련한데 배가 고파 아침에 사온 식빵에 땅콩잼을 가득 올린 다음 커피를 내려 질겅질겅 씹으며 생각했다. 정말 속상한 이야기들은 누군가에게 옮겨지는 순간 다른 성질의 것이 되어버린다. 차분히 생각해보면 왜 이해가 안가겠는가, 다른 이의 입장도 나의 입장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시콜콜 말하는 순간 나의 진심보다는 불평이 드러나고, 필요 없는 감정까지 상대방에게 전가하게 됨을, 그리고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조심스러워야 함을 아는 나이가 된 것이다.
전에는 마음이 조금 통한다 생각하면 내 생각을 가감 없이 말하곤 했다. 그러다 뒤통수도 맞고, 이렇게 저렇게 인연이 끊어지는 일도 있다 보니 최대한 입조심을 하게 된다. 불편하거나 힘든 일도 말하지 않지만, 기쁘고 자랑할 만한 일도 말하지 않는다. 괴로운 심경을 솔직히 말하면 약점이 되고, 좋은 일을 자랑하면 질투를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엔 털어놓아야 ‘무거운 입’을 유지할 수 있다. 일기장에라도 떠들고, 한바퀴 두바퀴 빙빙 돌려 글이라도 쓴다. 그러면 또 잠시 홀가분해지고, 감정을 털어내고 남은 찌꺼기들은 스스로 처리할 수 있을테니.
나이들수록 입이 무거워진다.
조금이라도 말하고 나면
속은 시원하지만 약간 후회되기도 하고.
믿을만한 사람에게 말하기엔
괜히 나까지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닌가 미안하기도 하고.
일기장이 유독 빽빽하게 차는 날은
마음이 너무나 힘들고 입밖으로 내기도 어려운 날이다.
어디에라도 솔직하고 싶은 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