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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프리랜서 사이
by 너굴양 Oct 05. 2017

제주에...살아보카?

헤이즐의 잡설 : 꿈과 현실 사이의 제주살이

2년 전 여름에 그린 그림일기다.


출장 때문에 오가던 제주가 다르게 보였던 때였다.


다큐멘터리 영화 <바람커피로드> 마지막 촬영을 핑계로 무작정 내려갔다. 내가 뭘 해야 하는 씬도 없었다. 그냥 갔다. 태풍 때문에 촬영은 취소됐고,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차 한 대로 신나게 돌아다녔다. 중산간에 안개가 너무 많이 껴 차가 기어가도 이타미 준의 박물관들을 보며 사진 건졌다고 좋아하고, 맛있는 커피와 밥을 잔뜩 먹으며 신났었다. 바쁜 와중에 갑자기 떠난 여행이라 그랬는지, 멤버의 합이 좋아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짧은 일정 동안 제주 속에 풍덩 빠졌다 나온 기분이 들었다.


다시, 제주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서울에 돌아왔는데, 제주가 그야말로 '눈에 삼삼한' 것이었다. 그때 제주에서 일을 하며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디지털노마드(digital nomad)라는 말을 알게 된 때이기도 했다. 어디서든 일할 수 있으니 실행에 옮길 수도 있었다. 실제로 제주와 발리에서 한 달 사는 것을 목표로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투병(?)으로 많은 것들이 틀어지고, 2년이 흘렀다. 그리고...


이름도 예쁜 <제주다움>,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주관하고 있다


이런 걸 발견했다.


제주에서 한 달 살 곳을 제공해주는 체류지원사업이라니. 게스트하우스의 침대 하나와 일할 공간을 주고 제주에서 어떤 일을 할지 체류 계획을 물었다. 서로 돈이 오가지 않으니 나에게는 사업 달성이나 정산의 의무도 없었다. 그래서...


바로 신청했다.


작가가 된 지 4년 차. 일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시점에, 나는 작가 본연의 실력을 쌓는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외주에 여전히 쫓기지만 작가로서의 내 이름과 너굴양을 더 알리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과의 거리가 필요했다. 외부 활동을 끊다시피 줄여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1년 넘게 진행하던 팟캐스트를 정리했고, 이어서 습관적이던 관계들에서 멀어지려고 했는데 제주에 있으면 물리적 거리 때문에 많은 것들이 해결될 거라는 직감이 왔다. 


친구들을 만나러 망원동에 가는 길에, <제주다움>에 선정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친구들은 '좋겠다~부럽다~'를 외쳤고, 엄마는 '그런 게 있다니 사기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내가 다시 제주 체류를 연장한 계기도 엄마의 말 한마디였다)


여행에서 제일 설레는 순간


'뭘 준비해야 하지...'하며 시간이 흐르다, 7월 세 번째 날 제주에 왔다.

수많은 에피소드와 인연들을 남기고 두 달이 쏜살같이... 는 좀 뻥이지만 빨리 지나갔다. 블로그에 주차별로 꾸준히 옮겨놓아야 했을 정도로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사람을 만나야, 제주다움


<제주다움>에서는 다양한 것들이 오갔다. 사람과 일, 생활, 여행이 얽혀있었다.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었고 아무 일도 없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사람'이 중심이기 때문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누군가는 제주에서 사업을 할 수도 있고, 작가 활동을 할 수도 있고, 이주를 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좋은 경험 했다'며 제주의 어떤 것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제주에서의 한 달'은 잊지 못할 것이었다. 이게 <제주다움>의 맛이다.


첫 달인 7월엔 서울을 오가며 제주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와중에 멤버들 합이 너무 좋아서 8월까지 연장 신청을 했다. 8월에는 제주에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고, '제주에 더 있고 싶다'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런 고민을 하기 시작할 때쯤 제주창혁에서 운영 중인 제주코워킹닷컴에 디지털노마드를 주제로 웹툰을 그리면서 9월까지 제주에 있게 되었고, 웹툰은 반응이 좋아 연말까지 연재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바닷가에서 노트북을 쓰진 않는다


혼자였으면 제주 생활은 어땠을까? 생각해봤다.


운전 못하는 뚜벅이니 여행에는 당연히 제약이 생겼을 거고, 혼자 잘 있어도 외로움을 많이 타서 금방 집이 그리워졌을지도 모른다. 일을 어디서나 할 수 있어도, 생활을 어디서나 할 수 없다면 디지털노마드는 참 어려운 것이 되고 만다.


<제주다움>을 통해 만난 사람들 덕에 제주가 더 좋아졌고, 제주와 관련된 일도 하나씩 할 수 있었다. 어디나 그렇겠지만 제주는 특히 제로 베이스로 시작하기 어렵다. 제로(0)가 아니라 마이너스(-)일 경우가 훨씬 많다. '제주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제로(0)를 플러스(+)로, 때로는 제곱으로 만들어주는 든든함이 된다.


여기에 많은 이주자들이 동의하는 부분, 가족이나 배우자, 연인이나 친구와 함께 지낸다면 제주 생활이 외롭지 않다. 제주에 와서 인터뷰한 많은 청년들 중 제주에서 짝을 찾거나, 가족이나 배우자와 함께 이주해 정착한 사례가 많았다. 오히려 정착 초기에 함께 많은 일을 해결하면서 일종의 전우애(?)가 쌓였다고 했다. 아무리 싸워도 결국 집에 있는 사람이 둘 뿐이니 산책을 하며 대화로 푼 적도 많다는 커플도 있었다. 제주는 자연이 사람을 고립시키는 경우도 많아 덕분에 벌어지는 사건들도 꽤 많을 것 같았다. 물론 나도 혼자가 아니게 되면서 제주 생활이 훨씬 좋아졌다.


의지할 사람 있으면 어딘들 안좋겠냐만, 사실 제주면 훨씬 좋다


그러다 보니 제주에 내려온 지 4개월째가 되었다.


제주에서 만난 분들은 '그래서 언제 도민이 될 거냐'고 묻고, 

서울에 있는 분들은 '너 정말 제주서 살거냐'고 묻는다. 


어느 날은 서귀포에 작은 집을 얻어 알콩달콩 살고 싶다가도, 그래도 서울에 가긴 해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 

어떻게 될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우선 이번 가을은 여기서 보내겠지 싶다.


7월에 서울에 두 번 다녀왔는데, 그때 엄마가 이런 말을 했다.

"너 거기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여름이 지나며 5주 동안 서울에 올라가지 않았는데 그때는 이런 말을 했다.
"네가 거기 있겠다는데 누가 말리겠니."


내가 딱히 '제주가 너무 좋아!'라고 구구절절 설명을 한 것도 아닌데.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원동력은 아마 '인정 욕구'일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잘 하는 것을 인정받고, 칭찬받고, 그래서 사랑받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내 존재 자체에 대한 무한한 애정만큼 내 생각과 감정, 나아가 하는 일까지 깊이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정말 좋은 삶일 것이다.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선택한 작가라는 직업은 주변으로부터 깊이 이해받기 힘들다. '인생은 누구와 있어도 외로울 수 있다'고 말하곤 했지만 내 깊은 곳에서는 외로운 것이 너무 싫어서,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볼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제주는 내 마음을 활짝 열어 주었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의 만남을 생각해보자. 아무리 호감이 가는 사람이라도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보여주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물론, 통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도시의 각박함은 우리가 자주 얼굴을 맞대고 속 얘기를 하기 어렵게 한다. 가족과 친구를 제외하고 서울에서 알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나게 마련이었다. 


좋은 사람들이라면 함께 일을 해도, 차를 마셔도 좋지만 시작이 어떤 주제로 묶여있다는 것, 그게 대부분 일적인 것이라는 건 굉장히 피곤하기도 하다. 나야 생계형 작가니까 이런 피곤함 쯤은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며 여기저기 얼굴을 비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래서 일만이 아니라 사적으로 좋은 관계들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각자 바쁜 생활 속에서 이런 관계는 성사되기가 힘들고 굉장히 오래 걸리는 일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맺어지는 것들이 나쁘거나 싫다는 의미는 아니다. 거기엔 그대로의 가치가 있다. 그리고 시간을 두고 봤을 때 드러나는 어떤 것들을 알아챌 수도 있고)


인간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피곤한 것이야 (봉당이, 1세)


8월 어느 날 밤, 우리(제주다움 팀)가 묵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1층 카페에 몇몇이 모여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정말 친한 친구, 어렸을 때부터 빨가벗은 모습까지 보여줬던 친구들하고도 못 나누는 이야기가 있어. 삶을 살아가는 방식, 철학이나 인문학적으로 무언가에 접근하는 일, 그게 생활과 굉장히 가깝고 나의 작업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들을 이야기하면 이해받지 못해. 근데 여긴 참 신기하다. 지금 언니 오빠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아주 내밀하고 깊은 것부터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나눈 이야기였기도 하지만(개발자도 있었지만 아무튼), 제주에서 만난 사람들은 속 깊은 이야기부터 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제주라는 곳이 사람의 마음을 말랑하게 만들어주기도 했고, 제주가 좋아서 내려온 사람들의 어떤 특성 같은 것도 있어서 '탐색하고-알아가고-맞추는' 초기 단계를 뛰어넘고 시작하는 느낌을 받은 적이 많다.


예측불허, 제주


사실 제주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이고 쓰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동안 메모한 것들을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글을 쓴 시점과 상황에 따라 모든 게 너무 달랐다. 

나의 마음(예를 들어 제주에 살어리랏다 했다가, 사람은 서울에 살아야지 했다가라던가), 하고 있는 일들, 제주에서 맺은 관계들까지, 다 달랐다. 

아주 건조하게 '디지털노마드로 제주에 살려면 필요한 10가지'같은 메모를 했다가, '제주는 사랑의 섬입네-'하며 감상적이 되기도 했다.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마주하면 경건해지고, 한라산에 낀 운무를 보며 출근하는 날에는 화산섬의 강렬한 매력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게 제주인가 보다 싶었다.


바닷가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는데 중산간으로 올라가면 어느새 해가 쨍쨍하고, 이번 달에는 만화를 그렸지만 다음 달에는 축제 현장 속에서 무전기를 들고뛰고 있을지도 모르는, 예측불허의 시간과 공간. 한마디로 정리되지도 않고, 그래서도 안 되는 곳, 오래 두고 보고 겪어보며 하나씩 몸으로 깨쳐야 하는 곳.


그래서 제주가 좋은가 보다.



덧 : 브런치 추천글에 떠서 알람이 봉봉 오네요 ^^ (봉봉은 제주말로 '가득 차오르다'는 뜻이에요)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다른 글도 읽고 가주시면 더 감사하겠습니다. 헤헷.





이 글을 읽고 가보면 좋을 링크


<제주다움> 11월 공고(모집 중) http://jccei.kr/event/all.htm?act=view&page=1&seq=174

[너굴양의 노마드툰] http://jejucoworking.com/category/KOR%20%E2%96%BC/Nomad%20toon

제주에 지내며 끄적인 잡글들 http://blog.naver.com/nergul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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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너굴양 그림일기]로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합니다. 가끔 잡글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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