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쉰두 번째 봄, 4월 3일

– 사라지는 기록들 위에서

by 네로

규담아, 쉰두 번째 생일을 축하한다.


아빠는 오늘 정말 오랜만에 회사에 출근했단다.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묘한 열기가 느껴졌어. 히터도, 난방기도 켜지지 않았는데 실내 온도는 이미 31도였다. 오후가 되자 33도까지 올랐고, 손끝에 닿는 공기가 눅눅하게 끈적였어. 실험실이라면 기계들의 열기 때문이라 이해가 될 텐데, 사무실은 그럴 이유가 없었단다. 사람도, 소리도, 바람도 거의 없는 공간에서 그렇게 뜨거운 온도만이 남아 있었다. 마치 오래된 시간을 녹이고 있는 듯한 공기였지.


밖은 반대로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어. 햇살이 조금만 사라져도 금세 바람이 차가워지고, 손끝이 시려. 겨울이 다가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세상은 늘 이렇게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곤 하지. 한쪽이 식으면 다른 한쪽은 타오르고, 뜨거웠던 것은 이내 식어버리고. 그게 어쩌면 자연의 순리일지도 모르겠어.


아빠의 책상 아래엔 큰 파일이 있었단다. 주간업무계획서를 모아둔 것이었어. 2022년 7월부터, 2025년 11월까지. 3년 넘는 시간의 기록이 그 안에 꽉 들어 있었지.


매주 빠짐없이 적어둔 일정들, 회의, 출장, 연구, 민원 대응, 보고서 작성, 그리고 각주처럼 적힌 ‘회의 결과 보류’, ‘결과 없음’, ‘다시 검토 예정’ 같은 문장들.

그 모든 게 결국 ‘아빠가 보낸 시간의 기록’이었어.


그걸 오늘, 전부 파쇄기에 넣었단다.

한 장씩 집어넣을 때마다 기계의 칼날이 종이를 삼키는 소리가 났어.

처음엔 아무렇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그 소리가 이상하게 마음을 찔렀어.

‘기록이 사라진다’는 건 단순히 종이가 사라지는 일이 아니더라.

그건 내가 살아냈던 시간, 버텼던 날들, 머뭇거리며 썼던 문장들이

한꺼번에 공중으로 흩어지는 느낌이었어.


그 종이들이 갈기갈기 찢어져 투명한 봉투 속에 쌓여갈 때,

아빠는 이상하게도 아주 먼 시간들을 떠올렸단다.

처음 출근하던 날, 너무 긴장해서 사무실 문 앞에서 두 번이나 숨을 고르던 그 아침,

처음 민원을 받던 날, 처음 기술이전을 하던 날,

리고 처음으로 ‘퇴근’이라는 단어가 조금 외롭게 들리던 날들 말이야.


기계의 칼날이 마지막 종이를 삼키는 순간,

공기 속에 종이 냄새와 함께 묘한 허전함이 남았어.

그건 마치 오래된 기억이 불에 타 사라질 때 남는 재처럼,

형체는 없지만 확실히 남는 잔향이었지.


규담아,

그 나이에 넌 어떤 하루를 살고 있을까.

회사에 다니고 있을까, 아니면 다른 일을 하고 있을까.


어떤 선택을 했든 괜찮다.

어쩌면 너도 지금쯤, 아빠처럼 책상 한편에 쌓인 종이더미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게 업무일지이든, 회의록이든, 혹은 네가 걸어온 인생의 흔적이든,

언젠가 너 역시 그것을 정리하며 ‘이제 다 지나갔구나’ 하고 느낄 날이 오겠지.


기록을 없앤다는 건 어쩌면 ‘잊기’가 아니라 ‘보내기’ 일지도 몰라.

그 시간 속의 나를, 그날의 마음을, 그때의 무게를

이제는 놓아줄 때가 되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일.

그게 어쩌면 성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조금은 슬픈 용기일지도 모르겠어.


아빠는 여전히 두려움이 많고,

이제는 몸보다 마음이 더 자주 무거워.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기록을 정리하며,

조금씩 나를 비워내며,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단다.


규담아,
만약 네가 지금 무언가를 버리거나, 정리하거나, 놓아야 하는 시기에 있다면
너무 망설이지 않아도 된단다.


지금 네가 파쇄기에 넣는 그 종이들은,
결국 네가 살아낸 시간의 증거야.
사라지더라도, 그 안의 열기와 흔적은 네 안에 남아
다음 이야기를 써 내려갈 힘이 될 거야.


그러니까 괜찮다,
모든 기록은 언젠가 사라지지만
모든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종이가 아니라, 사람이 남기는 일이란다.


오늘 사무실의 공기는 여전히 33도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아빠의 마음은 조금 서늘하고 평온했단다.
그건 아마도—
이제 정말 한 계절을 떠나보낼 준비가 된 마음이었을 거야.


사랑한다, 규담아.
오늘도 네 하루의 온도를 생각하며,

봄에,

아빠가.

이전 18화너의 쉰한 번째 봄, 4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