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쉰일곱 번째 봄, 4월 3일

- 동지와 팥죽

by 네로

규담아,

쉰일곱 번째 생일을 축하한다.


오늘은 동지란다.

해가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어지는 날.

그러니 오늘의 어둠은 괜히 더 깊어 보이고,

그만큼 내일의 낮은 아주 조금 더 길어질 준비를 하고 있겠지.


아빠가 다니던 회사에서는 오늘 점심때 팥죽이 나왔다고 하더구나.

동지마다 어김없이 나오는 팥죽이지만,

그릇을 받아 들고 자리에 앉으면 늘 같은 생각이 든다.

아, 또 한 해가 여기까지 왔구나 하고.


규담이는 팥죽을 좋아하니?

팥 껍질, 그 특유의 질감 때문에 싫어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달큼하면서도 씁쓸한 팥맛이 입안에 오래 남는 날이 올 거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 앞에서

숟가락을 들어 한 숟갈 떠서,

후후 불며 조심스럽게 입에 넣다가

생각보다 뜨거워서 입천장을 데일 뻔한 순간도 한두 번쯤은 겪었겠지?



팥죽 속에 몇 개 들어 있지 않은 새알은 더 조심해야 해.

겉으로 보기엔 다 식은 것 같아도

입에 넣고 씹는 순간,

안에 숨겨두었던 열기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거든.

괜히 놀라서 씹다 말고 숨을 들이마시게 되고,

그러다 혼자 웃음이 나기도 하지.


아빠는 새알을 볼 때마다

사람 마음도 꼭 그렇다는 생각을 한단다.

겉으로는 다 식은 것처럼 보여도,

속에는 아직 뜨거운 것들이 남아 있는 사람들.

말을 아끼고, 감정을 숨기고,

괜찮은 척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 누군가의 말 한마디,

혹은 아주 사소한 계기로

그 안에 남아 있던 온기가 불쑥 드러나는 사람들 말이야.


동지는 밤이 가장 긴 날이지만

사실은 이때부터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기도 하다.

눈에 띄게 달라지지는 않지만,

아주 조금씩, 아주 천천히.

그래서 동지는 끝이라기보다 방향을 바꾸는 지점에 가깝다고

아빠는 생각한다.


규담아,

혹시 네 삶에도 그런 시기가 있었니.

밤이 너무 길어서

이대로 아침이 오지 않는 건 아닐까

괜히 불안해지는 날들.

하지만 기억해 두렴.

밤이 가장 길어졌다는 건

이미 다시 밝아질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라는 걸.

팥죽이 천천히 익어가듯,

사람의 마음도 시간을 들여 익어간다.

급하게 끓이면 넘치고,

불을 너무 세게 하면 쓴맛이 나지.

그저 곁에서 지켜보며

알맞은 온도로 기다려 주는 게 가장 어렵고, 또 가장 중요하단다.


쉰일곱의 규담이는

어떤 밤을 지나고 있을까.

어쩌면 이미 여러 번의 동지를 건너왔겠지.

그 밤들이 너를 조금 더 단단하게,

조금 더 너답게 만들었기를

아빠는 조용히 바라본단다.


오늘 밤은 길지만,

내일부터는 다시 낮이 길어진단다.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 말고,

지금 이 계절을 그대로 지나가렴.

봄에,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