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들의 13월

22.05.18 11:58 일기

by 네로

22.05.18 11:58 일기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딱 하루만, 하루만 더 버티자는 마음으로 지내다 보니 어느덧 일곱 달이 지났다. 그동안 가족들의 후유장애 진단서가 나왔고, 그나마 몸을 추스를 수 있었던 가족들은 서로를 보듬어가며 지냈다.


아내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내색하지 않았다. 다들 괜찮은 줄 알았고, 괜찮다고 믿으며 하루하루를 무리해서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다. 두 달 동안 깁스를 해야 했다. 괜찮다, 괜찮다 했지만, 부어오른 발은 말하지 않아도 아파 보였다. 마치 우리 가족 모두가 ‘괜찮다’며 지워온 그날들처럼, 그 발도 그렇게 아파 보였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런 아내에게 화를 내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많이 아팠지, 어쩌다 그런 일이 생겼냐고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조심하지 그랬어.” “왜 그렇게 다녀.” 그렇게 내뱉은 말들이, 아내의 등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 박혔다.


일은 또 어떻게 하나. 이기적인 계산이 먼저 앞선 나 자신을 보며, 참 형편없는 사람이었구나 싶었다.

그렇게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초침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형사사건이 시작된다. 오늘 오후 두 시, 청주지방검찰청에서 처음으로 가해자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무슨 말을 할까, 고민했다. 묻고 싶은 말은 많지만 결국은 이렇게 정리했다.

몸은 괜찮냐고, 그 말부터 해보자고.

왜 그랬냐고 묻지 않기로 했다. 용서를 빌지도 않겠지, 그건 그 사람의 몫이다. 나는 다그치지 않기로 했다. 그저, 그런 일이 일어났을 뿐이라고,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내가 20대 중후반에 암에 걸렸던 것도, 장인어른이 사고로 돌아가신 것도, 가족여행 중 당신으로 인해 가족 모두가 크게 다친 것도, 아버지가 중추신경을 다치고, 할머니가 의식을 잃은 채 몇 개월을 누워 계셨던 것도, 그저 운이 안 좋았던 거라고.


상대측 보험사는 아직도 예전에 할머니가 처방받으셨었던 아스피린으로 기왕증 운운하고 있다.


할머니는 결국 목 아래로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셨다. 우리가 직접 간병을 할 수 없는 환경이라, 결국 개인 간병인을 모시게 됐다. 병원비와 간병비가 점점 더 부담스러워졌지만, 그보다 더 마음이 아팠던 건 따로 있었다.


뇌 손상의 여파로 할머니는 치매 증세가 생겼고, 어느 순간부터는 마치 유아처럼 되셨다. 예전에는 잠깐씩이라도 나를 알아보셨는데, 지금은 전혀 그러시지 못한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걸어도, 할머니의 눈에는 내가 비치지 않았다.


그 자리에 분명 할머니가 계시지만, 그 눈빛도, 목소리도, 그 따뜻했던 웃음도 이제는 그곳에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자꾸만 손을 잡게 된다. 잡고 있으면, 어쩌면 아주 잠깐이라도 예전의 할머니가 돌아올까 봐.

아내는 짐을 들고 계단을 내려오다 다리에 금이 갔고, 여전히 절며 걷는다.


나는 아내를 부축하고 천천히 다시 걸었다. 그리고는 아내의 회사에 데려다 주고 다시 실험실로 향했다.

오전 중 실험을 마무리하고 결과를 정리해서 연구사님께 보고해야 했다.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다.


나는 아직 이직할 곳에 합격하지 못했다.

가해자는 아직도 한마디 말도 없다.

가해자 보험사는 사고 났을 당시 동의해줬던 건강보험 내역 조회를 토대로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묻지 않기로 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는지 억울해하지 않기로 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을 때가 있다.

종종 정말로 힘들때는 하늘을 올려다 보게 된다.


왜 나였는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내가 아닐 이유도,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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