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지 못하는 것들에 대하여(22.08.07 02:54 일기)
22.08.07 02:54 일기
농촌진흥청은 국립원예특작과학원, 국립식량과학원, 국립축산과학원, 농촌인적자원개발센터 그리고 국립농업과학원이 속해있다.
내가 근무했던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생물부 2층에는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로 선정된 연구들이 나열되어 있다.
당연하지만, 그곳에 내 이름이나 연구는 없다.
그동안 꾸역꾸역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대학 시절 단기 계약직으로 시작했던 그 직장, 농촌진흥청.
성과를 내는 선배들을 보며 언젠가는 나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었다.
나는 현재 경남 사천의 공공기관에 합격했고, 아내와는 떨어져 혼자서 근무하며 퇴직금을 기다리고 있다.
퇴사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 사이 내 몸무게는 8킬로그램이 줄었고,
스스로 잘 관리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퇴직금 지연에 동의했던 서류에 서명한 일이 요즘 들어 조금 후회가 된다.
할아버지는 어느 날 할머니에게 “아이들 고생 그만 시키고, 이젠 그만 가”라고 말씀하셨다.
삶 아닌 삶과, 죽음 아닌 죽음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나는 그 경계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기다림이란, 어쩌면 종이 한 장을 바라보며
그 종이를 받으려 손을 내미는 나 자신의 행위일지도 모른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 순간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의 나약함이 계속해서 되살아난다.
지인과 통영에 낚시를 다녀오겠다던 장인어른이 망인이 되어 돌아왔던 날.
병원에서 네 시간 넘게 검사지휘서를 기다렸다.
“그 추운 곳에 아버지를 두고 싶지 않다”며
눈물짓던 아내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는다.
해경이 도착했던 그 순간, 사고였는지, 아니면 발을 헛디뎌 바다에 빠지며
머리를 부딪쳤던 건지 물었고,
인터넷에는 장인어른 사고에 관련된 뉴스에 악플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손톱을 물어뜯는다.
지금은 손톱이 너무 닳아 더 물어뜯는다면 분명 피가 날 테지만,
그래도 나는 끝끝내 손톱 끝을 물어뜯는다.
손톱이 벗겨지고 피가 흐른다.
새벽이 되어서야, 기다렸던 검사지휘서가 도착했다.
혹시라도 피가 묻을까 손을 다시 닦고 종이를 받았다.
그 종이의 감촉이 손끝에 남아 있다.
그것 하나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내 무력함을 한탄했고, 세상의 잔인함을 원망했다.
겨우겨우 견뎌냈더니, 이젠 ‘후유장애 진단서’라는 또 다른 종이 한 장 앞에서 또다시 무너졌다.
세상에 버림받았다고 말하긴 부끄럽지만,
잠깐이라도 내가 세상을 놓아본 적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암이라는 선고를 처음 들었을 때 옥상 끝에서 바라봤던 풍경,
검사지휘서를 기다리며 병원에서 흘러간 긴 시간,
교통사고로 쓰러진 가족들이 깨어나길 바랐던 손길,
할머니가 식물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말에
“살려달라”며 의사의 손을 붙잡았던 내 손끝.
그중 어느 하나,
기다림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기다림은 마치 다시 돌아오는 비극 같았다.
그리고 비극은,
사람을 죽인다.
잠이 오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벗어던지고 싶었던 모자를 다시 쓰고,
인간다움을 깊게 눌러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