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자추모관에서
전주에 들렀다. 효자추모관에 가기 위해서였다.
올해 초부터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3월쯤 다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될 것 같았다. 그러면 한동안 서울에 머물게 될 터였고, 전주는 더 멀어질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괜찮을 때, 한 번 더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전 직장이었던 농촌진흥청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 수천 명? 그중 마음이 맞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신 오래 남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와 두 살 터울의 형, 그리고 우리보다 한 세대를 먼저 살아온 고모 같고 어머니 같은 연구원 선생님들. 우리는 나이로 보면 어울리지 않는 구성이었지만, 그래서 더 자주 모였다.
그중 한 분이 이곳에 계신다.
추모관으로 들어서기 전, 인공폭포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폭포는 완전히 얼어 있었다. 흐르던 물이 멈춘 자리마다 얼음이 붙어 있었고, 떨어지다 굳은 물줄기들은 그대로의 자세로 매달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차가움보다, 멈춤이 먼저 느껴졌다.
나는 종이가방을 들고 3층 추모관으로 올라갔다. 장례식장 이후 세 번째인가 보다. 작년 12월, 올해 1월, 그리고 2월. 한 달에 한 번꼴이었다. 핑계를 대고 싶어서 온 날도 있었고, 그냥 힘들어서 푸념하러 온 날도 있었다. 고모는 몸을 숙이지 않아도 되는 높이에 있었다. 딱 내 눈높이였다.
종이가방에서 텀블러와 드립커피, 긴 종이컵을 꺼냈다. 우리 회사에서 만든 커피였다. 근처에서 각각 추모를 하고 계신 두 분께 한 잔씩 나눠드렸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 안 되는 몸이지만, 그날은 마음만 나누기엔 날이 너무 추웠다. 커피는 따뜻한 물만 있다면, 20잔 정도 내릴 만큼 가져왔으니까.
이깟 게 뭐라고.
이게 먹고싶었다면, 그랬다면 말이라도 하지.
10개든 100개든 택배로라도 보내줬을 텐데.
커피 향이 코를 찌르는 줄만 알았는데, 눈도 찌르고 마음도 찔렀다. 눈물과 콧물이 한꺼번에 쏟아졌고, 그러면서 가슴에 박혀 있던 가시 하나가 빠져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고모가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한 번 더 볼 걸 그랬다고.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내가 밤송이 마냥 가시가 박히진 않았을 거라고.
그 사람, 고모는 늘 엄살이 심했다.
“현수야, 이것 좀.”
“이것도 해줄 수 있어?”
고모뻘 나이라고, 노안이라는 핑계로 늘 그렇게 부탁했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도 “이번만요” 하고는 들어주곤 했다. 용액을 만들고, DNA를 추출하고, 정제했다.
“고마워.”
웃으며 말하던 얼굴이 아직도 선하다. 액자 속 얼굴도 여전히 웃고 있다. 그게 괜히 심술이 났다.
가만히 앉아있는데, 두통이 몰려왔다. 헛구역질을 몇 번 했다. 요즘은 통증이 더 잦다. 걸을 때는 몸이 한쪽으로 쏠린다. 바닥에 선을 긋듯 시선을 고정하고, 집중해서 걷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한 사십 분쯤 있었던 것 같다.
밖으로 나오니 날이 유난히 차가웠다. 들어갈 때는 느끼지 못했던 추위였다.
아, 몸속에 박혀 있던 가시가 하나 빠져서구나. 그 자리로 바람이 들어오는구나.
멀리 붉은 노을이 하늘 끝자락에 걸려 있었다. 누군가,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바람이, 빠져나간 자리로 들어왔다.
때가 되면 제가 가겠습니다.
얼마 남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 주변 사람들은 그만 데려가시지요.
안 그래도 친한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