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기 때문에, 내가 살아가는 이유
2025년 4월 26일,
할머니께서 소천하셨습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장례식장은 본가인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서 가장 가까운 전북 남원시 인월로 정했습니다.
오랫동안 인천에 계셨기에, 마지막 길만큼은 익숙한 곳에서 보내드리고 싶었습니다.
진주와 남원의 화장터는 이미 예약이 꽉 차 있어서 직장의 사무국장님께 부탁드려 제가 있는 사천시에서 화장을 진행했습니다.
주변엔 슬픔을 터뜨리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 가족은 그 누구도 울지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괜한 욕심에 할머니를 더 힘들게 한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조금만 더 곁에 있어주었으면 했습니다.
슬픔이 꼭 눈물로만 표현되는 건 아니라고,
떠난 사람을 애도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저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제 두 손이 들고 있던 할머니의 얼굴을 차분히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처음,
내가 아프다는 것을 실감했을 때
아내가 가장 자주 한 말은 “괜찮아?”였습니다.
그다음으로 많이 한 말은 “미안해”였습니다.
나는 늘 물었습니다.
“뭘 그렇게 미안해해.”
그 말하지 말라고,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다고,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던 장면이 아직도 또렷합니다.
스물다섯이던 우리.
주변 동료들은 하나같이 석사나 박사 학위자였고,
우리는 그저 어리고, 아무것도 몰랐고, 많이 서툴렀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야 했습니다.
누구 하나라도 뒤처지지 않도록,
한 사람 몫을 둘이 나눠 짊어지듯 하루하루를 버텨냈습니다.
매일은 타성에 젖은 반복이었습니다.
눈을 뜨면 출근하고,
익숙하지 않은 서류를 붙잡고,
조금 알 것 같았던 연구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나만의 연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내 삶을 지탱해 줄 유일한 기둥처럼 느껴졌습니다.
연차를 쪼개 대학원 수업을 들었고,
밤이 깊은 줄도 모른 채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습니다.
씻고 나면 자정, 그리고 또 다음 날이었습니다.
몸이 버티지 못하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다들 그렇게 사니까,
우리도 괜찮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어느 날 내가 말했습니다.
“속이 좀 안 좋은 것 같아.”
아내는 조심스럽게 소화제를 건넸고,
며칠 후에도 낫지 않는다고 하자
“병원에 가보자.”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때 곧장 같이 병원에 갔어야 했습니다.
그 일 이후,
아내는 자주 자책했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일찍 말했더라면…”
“그날, 같이 갔어야 했는데…”
“혹시 내가 무심했던 건 아닐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괜찮다고,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 말이 닿지 않는 마음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내가 잠든 밤이면
아내는 좀처럼 잠들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뒤척일까 봐
늘 조용히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나도 아내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가능한 병원 진료는 혼자 다녔고,
아내는 서울발 전주행 버스터미널에서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 모습을 떠올리면,
도무지 무너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에도 그 터미널에 조용히 앉아 기다리던 아내의 모습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나는, 돌아가야 할 사람이다.
내가 꼭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
2017년부터 2022년 봄까지,
그리고 2022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나는 다시 중증 환자가 되었습니다.
조금 더 나은 회사를 알아볼까 고민도 했지만,
좋은 회사에 가려면 신체검사를 통과해야 하니,
현실적으로 어렵겠지요.
“조금만 더 나아지면…”
그 ‘조금’이라는 말이
내겐 언제나 멀기만 합니다.
여전히 일하고 싶습니다.
어딘가에 내 자리를 만들고,
내 이름을 건 무언가를 해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말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아직은 멈춰 있으라고.”
병원 대기실에 앉아 흐릿한 유리창 너머 햇살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이 기다림은 언제쯤 끝이 날까.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한 마음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내가 이 기다림을 이겨내지 못하면 어쩌나, 그런 두려움이 문득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 고요하고 느린 시간 속에서
나 혼자만 멈춰 선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누군가는 각자의 자리에서
가만히 이겨내고 있는지도요.
하지만 지금은 잠시 멈춰 선 시간일지라도,
나는 반드시 다시 걸어갈 겁니다.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요.
세상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미 삶 자체가 고된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어떤 말은,
그대로 저주가 되어 상대방의 가슴속에 박히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건 위로의 의미로 건넨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함부로
“힘내세요”라는 말을 꺼내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에게도
돌아가고 싶은,
반드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지 않으신가요?
그 시절,
내게는 터미널에서 기다리던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보다 더 작은 이유 하나가 생겼습니다.
자그마한 손,
작은 눈망울,
온 세상의 가능성을 품은
한 아이.
아마도, 기적이었을 겁니다.
어느 날,
아내가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며
그걸 내게 들려주었습니다.
정말로,
작고 분명한 울림이었습니다.
‘쿵쿵쿵’
그 소리만으로도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버스에 오릅니다.
서울로 향하는 길 위에서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내가 돌아와야 할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기꺼이,
기꺼이 돌아오기 위해
나는 지금,
또 한 번 떠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그건 결국—
돌아가서 만나야 할 사람(이유)이 있기 때문 아닐까요.
위 글들은 다음카페 암과 싸우는 사람들에 제가 게재했었던 투병일기와 간병일기를 중 일부를 다시 적어 올리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사실은 조금 더 천천히 올리고 싶었으나, 지금 저에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시간이 부족하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급하게 올렸습니다.
부족한 위로의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당신께서 조금이나마 평안함에 이르셨기를 바랍니다.
2025년 7월,
브런치스토리에 첫 글을 올리며,
Buona Fortuna, 당신에게 행복을
_by 네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