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27 23:57 일기
2023.03 27 23:57 일기
시간이 정말 빨리 흘러갔다.
할머니를 제외한 가족들은 모두 퇴원 후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아버지는 중추신경 쪽에 이상 소견이 보여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할머니는 이제 말을 하지 못하시고,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퇴화하셨다.
지금은 개인 간병인께서 옆을 지켜드리고 계신다.
2주에 한 번, 아내가 사천으로 내려오면 밤이 되어서야 지척에 있는 수양공원을 걷는다.
결혼 8년 차에 주말부부.
그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3대가 덕을 쌓은 것 아니냐”며 부러워한다.
나는 그 말에 웃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큰 기관에만 있다가 7명만 근무하는 기관은 처음이었다.
내가 근무했던 팀이 연구사님을 포함해 7명이었는데, 이곳의 연구 인력은 연구팀장님 1명과 나, 두 명뿐이다.
재단에 있는 간이실험실은 실험대조차 없었지만 지금은 set up이 끝났다.
특정 시료에서 미생물을 분리하고, 특성분석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된다.
그중 조금은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미생물을 특허출원하기도 했고, 기술이전까지 하려고 업체를 찾아보고 있다.
농촌진흥청에 근무할 때는 연구만 하면 됐지만, 지금은 이를테면 볼펜 한 자루를 사기 위해 총 4개의 기안을 올려야 하는 행정 늪에 빠져버렸다.
대체 연구는 언제 할 수 있을지 사실 감이 잡히질 않는다.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까지 근무한다고 될 일은 아닌 것 같다.
인간관계가 무척 힘들다.
나는 이곳에서 버티기 힘들다는 말을 주변인들에게 곧잘했다.
실제로 다시 한번 이직을 해볼까 고민도 했고, 주변인들은 자리가 생기면 먼저 연락을 주겠다고 했었다.
그리고 회사 내 곪아있었던 인간관계 문제가 터져버렸고 나도 덩달아 휘말려 버렸으며, 원인제공자보다 내가 더 나쁜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지금은 심리상담치료와, 정신병원에서 약을 타서 먹고있다.
도망치고 싶지만 나는 이제 갈 곳이 없다.
농촌진흥청 때와는 다른 의미로 힘들었다.
나는 약에 기대었다.
트리렙탈정 300mg, 알프람정 0.5mg, 인데놀정 40mg, 아고틴정 25mg, 환인클로나제팜정 0.5mg, 파록세씨알정 25mg 다행히 효과는 있었고 대가라고 해봐야 조금 멍하게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을 뿐이었다.
회사에서 근무할 때는 약에 취해서 시간을 보냈다.
농촌진흥청에서 근무했던 직원들이 찾아와주기도 했고, 나를 걱정해줬던 사람들의 도움으로 잘 버텨내고 있었다.
그렇게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나는 이곳에서 일이 조금 익숙해질 즈음, 두통과 어지럼증, 종종 찾아오는 구토가 너무 심해 병원에 들렀다. 작은 도시라 그런지 신경과 선생님은 매일 계시지 않았다.
우선은,
내과에서 받은 약 5일, 그래도 낫지않아서 신경과 선생님이 계시는 날 내원하여
신경과에서 받은 알모그란정이라는 약을 5일치 처방 받았다.
그래도 도무지 낫질 않아서 CT를 찍고 이상소견이 보여 MRI를 찍었다.
찍고 나오는 길,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게 진통 때문인지,
조영제를 맞은 팔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조영제 주사를 빼기 위해
응급실로 향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15분 가까이, 조영제가 다 떨어져 아무것도 내려오고 있지않은 바늘만 바라보았다.
우연히 지나가던 간호사 선생님이
바늘을 빼주셨고,
옷을 갈아입고
결과를 들으러 갔다.
20미터도 채 되지 않을 거리였는데
그 길이 참 멀게 느껴졌다.
머릿속에 종양이 있다고 했다.
뇌종양이란다.
비현실적인 감각이었다.
조영제를 사용했기 때문에 염증이나 종양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했다. 간이 좋지 않아서 처음에 조영제를 안썼으면 좋겠다고 한 내 말을 전해들었던 모양이다. 의사 선생님은 뒤통수에 하얗게 보이는 것이 두통의 원인인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소뇌다리와 제4뇌실 근처에 있는 종양이고 위험할 수 있으며 양성인지 악성인지, 크기 변화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더 큰 병원인 대학병원을 가야한다고 말했다.
삐- 하는 소리가 나를 두드린다.
위암 다음엔 뇌종양이구나.
회사에서는 언제오냐는 전화가 세 통, 네 통 낙엽처럼 쌓이고 있었다.
아직 벚꽃이 피지도 않은 수양공원 위로 어둠이 뒤덮은 몇시간 전, 나는 아내와 함께 공원을 걸었다.
물에 젖은 봄 공기의 냄새 속에서,
문득 그런 바람이 들었다.
아주 만약에—
어느날 이곳에서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도
내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신기하게도 나를 느낄 수 있기를.
아내가 그렇게 답을 얻을 수 있기를.
달빛이 새하얗게 내려앉는 밤,
잠들기 전,
나는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