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마흔일곱 번째 봄, 4월 3일

고담사로 가는 길

by 네로

규담아,


명절 아침이었단다. 아직 해가 완전히 오르기 전의 공기엔 서늘한 물안개 냄새가 묻어 있었고,

논둑길을 따라 걷는 발끝마다 하얀 서리가 바스락거렸지.

아빠는 할아버지와 함께 노란색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섰어.

보따리 안에는 사과 하나, 배 하나, 황태포 한 마리, 버터와플 한 봉지, 종이컵 두 개, 그리고 좋은데이 한 병이 들어 있었지.

무겁지 않은 짐이었지만, 묘하게 마음 한쪽이 숙연해지는 길이었단다.

우리가 향한 곳은, 고담사 — 오래된 마애여래입상이 모셔진 절이었어.


길가엔 코스모스가 만개해 있었고,

햇살을 등진 꽃잎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파도처럼 물결쳤다.

그 사이를 걸으며 아빠는 문득 생각했단다.


“언젠가는 코스모스도 이름이 없던 시절이 있었겠지.

누군가 그 아름다움을 알아봐 주기 전까지는.”


그날따라 바람이 참 부드러웠어.

먼 들판 너머로는 논물 냄새와 흙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스쳤고,

길 옆의 돌담에는 초록빛 이끼가 촘촘히 내려앉아 있었다.

그 돌담 위로 떨어진 낙엽 한 장이 바람에 밀려 천천히 굴러가다가,

우리의 발치에 닿았을 때,

할아버지는 묵묵히 몸을 굽혀 그것을 주워 손끝으로 쓸어내리셨지.

그 손끝에는 오래된 세월이 묻어 있었어.

그날, 아빠는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늙어 보인다는 걸 느꼈단다.


가는 길은 오르막이었어.

낡은 흙길을 따라 발자국이 이어졌고,

그 아래로는 작은 개울이 졸졸 흐르며

자갈 사이에서 햇빛을 반짝였지.

새들이 이따금 가지 사이를 뛰어다니며 짧은 울음을 남기고,

절 근처에 다다를 무렵엔 바람 속에서 맑은 풍경소리가 들려왔단다.

“댕—댕—”

아빠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차분해졌어.

마치 세상의 모든 슬픔이 잠시 멈추는 것 같았지.


그날 고담사에서 본 풍경이 참 아름다웠다.

산자락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이 비단처럼 흘러내리고,

그 빛이 할아버지의 얼굴에 닿을 때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먹먹해졌어.

할아버지는 잠시 그 노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단다.


“세상일은 다 흘러가더라.”


아빠는 그 말을 오래 기억하려 한단다.

그 말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살아온 날들에 대한 다정한 인정이었어


규담아,

아빠에게 고담사로 가는 길은 단순히 절에 다녀온 기억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사랑을 배운 시간이었단다.

할아버지와 함께 걸으며,

말보다 더 깊은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았지.

그 침묵이야말로 가족이 서로에게 보내는 가장 큰 위로였다는 것도.


언젠가 너도 그런 길을 걷게 될 거야.

그 길이 산길이든, 도시의 뒷골목이든 상관없어.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한 길이 될 거야.

그 길 위에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빠가 느꼈던 그 고요한 감정 —

말로는 다 전하지 못할 그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그날,

아빠는 고담사에서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단다.

언젠가 나에게 아들이 생긴다면,

그 아이와 이 길을 꼭 함께 걷고 싶다고.

지금 그 약속을 이렇게 지키는 거야, 규담아.

비록 종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너를 향한 마음은 언제나 바람을 타고 닿을 거야.


사랑한다, 규담아.

언제나 네 발밑의 흙이 부드럽고,

네 길 위의 바람이 따뜻하길.


봄에,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