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마흔여덟 번째 봄, 4월 3일

소소한 나날들에 대하여

by 네로

규담아,

마흔여덟 번째 봄, 혹은 가을쯤에 이 편지를 읽게 될 너에게
오늘 아빠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소소한 하루를 들려주고 싶구나.
요즘 아빠가 있는 회사는 비가 자주 내린다고 한단다.


창밖으로는 산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고, 비가 그치면 그 산 위로 얇은 안개가 깔려.
습기를 머금은 흙냄새가 복도를 따라 들어오고,
어느 날은 꿩이 지나가고, 어느 날은 산새들이 울다 날아오르지.
참 이상하지 않니, 어릴 땐 이처럼 조용한 곳을 벗어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는데,
이제는 그런 풍경이 오히려 마음을 다독여주고 있다는 게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원을 그리며 산다고 하더구나.

멀리 도는 이도 있고, 작게 한 바퀴를 도는 이도 있지만,

결국 자신이 떠나왔던 자리로 돌아온다고.

아빠의 동네 친구 중 한 녀석은 그 작은 고향 마을에서 편의점을 하고 있고,

어릴 적 함께 소꿉놀이하던 여자아이는 남원 실상사 앞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단다.

처음엔 이상하게 느껴졌지.

세상을 보겠다고 뛰쳐나가던 사람들이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하지만 지금은 이해해.

다시 돌아왔다는 건 실패가 아니라, 그리움이 선택한 자리라는 걸.


아빠도 돌아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요즘 종종 한단다.

어릴 적 지리산 아래에서 듣던 새소리, 봄이면 흩날리던 진달래 향기,

논두렁을 따라 흘러가던 물길의 소리 —

그 모든 것이 아빠 마음 깊은 곳에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마음이 쉬고 싶은 자리는 결국 그 몇 곳뿐이더라.


주머니에 손 넣고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일,

비 오는 날, 작은 우산을 함께 쓰고 가는 학생들을 보는 일,

웃지도 울지도 않는 얼굴로 하루를 삼키는 일 —

이것들이 다 지나고 나면 참 따뜻한 기억으로 남더구나.


너는 지금 어디쯤을 걷고 있을까.

어쩌면 너도 언젠가 작은 원을 그리며

네가 떠나온 자리로 돌아갈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돌아간다는 건 과거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잊고 지낸 마음을 다시 맞이하는 것이니까.


아빠는 바란다.

네 인생의 어느 계절에도

이 소소한 나날들이, 너를 무너지지 않게 지켜주기를.

눈부신 성공보다, 남몰래 따뜻했던 하루가

사람을 끝내 살아가게 하더구나.


사랑한다, 규담아.

아빠는 오늘도 비 내리는 병원 안에서,

네가 어디에 있든지 그날이 조금 따뜻하길 바라며

이 편지를 쓴다.


봄에,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