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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동문학가 강인석 Sep 07. 2017

남과 여,
관계를 규정하는 아이콘

‘봄날은 간다’의  ‘라면’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에 포함되었든, 그렇지 않았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음식’에도 의미가 있다. 모든 영화 속 설정이 텍스트가 되어 읽히는 것처럼 음식도 메시지를 전달하는 텍스트의 일부분이다. 때론 작위적인 해석이 될 수도 있겠지만, 텍스트는 자유롭고 영화도 자유롭기에 의미에 대한 해석은 언제라도 시도될 수 있다.  


라면은 어떻게 해도 라면일 뿐 

  이영애와 유지태가 주연한 영화 ‘봄날은 간다(2001)’는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준호 감독이 두 번째로 만든 이 멜로드라마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라면’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밀고 당기는 남녀의 이야기 속에서 ‘라면’은 일차적으로 여자와 남자, 두 사람의 관계를 쉽고 명확하게 규정해 주는 역할을 한다. 나아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사랑의 방향성도 담고 있다. 

'라면'이 돋보이는 영화  '봄날은 간다'

   겨울에 접어드는 어느 날 사운드 엔지니어와 지방의 라디오 PD로 만난 상우와 은수. 자연의 소리를 담는 첫 작업 후 자신의 집까지 바래다준 상우에게 은수가 던진 한마디는 “라면 먹고 갈래요?”이다. 그들의 사랑은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그렇게 시작된다. 결국 그들의 관계는 라면이다. 

  라면은 음식이라고 하기에도 어정쩡한 인스턴트식품이다. 쉽게 끓이고 쉽게 먹을 수 있지만 그것이 주식이 될 수 없다. 맛은 있지만 영양가는 없고, 싸구려다. 어쩌다가 한 번 씩 찾는, 그리고는 금방 또 싫증 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라면은 처음부터 상우와 은수의 사랑, 그들의 관계가 결국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를 보여주는 설정이다. 주식이 될 수 없는 라면처럼 서로의 삶 속에 영원히 자리 잡을 수는 없다. 라면처럼 한계가 명확한 관계, 특히 은수에게 상우는 필요할 때 찾는 존재, 좋아하지만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존재, 미칠 듯이 좋다가도 금방 또 돌아설 수 있는 존재이다. 게다가 돌아섰다가도 다시 또 생각나서 불현듯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존재이다. 

  상우도 그 라면의 의미를 알고 있다. “들어가서 라면 끓여”라는 은수의 말에 상우는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한다. “은수씨, 내가 라면으로 보여?” 그리고 그는 돌아선다. 겨울에 만나 봄이 되어도 은수에게 상우는 ‘라면’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둘 사이의 한계를 발견하고 돌아서지만 남자에게 라면은 중독성이 있는 것일까,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라면 먹고 갈래요?" 그녀는 그에게 물어본다.

  물론 이 영화에서 은수와 상우의 관계가 라면으로 정리된다고 하더라도 상우에 대한 은수의 사랑이 계산적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사랑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은수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은수는 그러한 사랑과 관계 맺음에 익숙하다. 의도적이었다면 연출자의 의도였거나, 그것을 그렇게 읽어내는 관객의 의도였을 뿐이다. 


또 다른 음식 더 찾아보기

  영화 속에서 라면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았으니, 또 다른 음식들은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 살펴보는 것도 재밌겠다. 김치, 삼겹살, 북엇국, 자판기 커피…. 그리 많은 음식을 찾을 수는 없지만, 라면과 함께 등장하는 김치도 의미부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라면이 인스턴트인데 반해 김치는 담가 놓고 오랫동안 먹는 반찬이다. 둘의 관계가 시작될 때 “상우씨, 김치 담글 줄 알아?”라는 은수의 질문에 상우는 “그럼, 내가 못 담글 것 같아?”라고 대답한다. 어찌 보면 은수의 사랑이 라면과 같았다면, 상우의 사랑은 김치와 같지 않았을까? 

같이 먹은 보리밥. 그의 세계로 들어가는 그녀의 첫 걸음이다.

  두 사람이 함께 첫 작업을 하러 갔던 대나무 숲이 있던 집. 그 집에서 먹었던 수북이 담긴 보리밥도 짧게 등장하지만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두 사람이 당황하리만치 수북이 담겨있는 보리밥. 은수는 첫 만남인 상우의 밥그릇에 자신의 밥을 덜어 준다. 상우의 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밥이 많아서겠지만 그녀의 이 행동으로 일이 아닌 개인적인 관계가 시작된다. 은수의 넘겨준 한 술 밥은 상우의 세계로 들어온 은수의 첫 발걸음이다. 쌀과 보리가 섞여있듯이 둘의 세계도 그렇게 섞인다.

  반면 북엇국은 관계의 끝남을 담아낸다. 과음한 은수를 위해 애써 북엇국을 끓여주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한다. 라면이 아닌 북엇국은 자신의 삶으로 더 이상 들어오면 안 되는 상우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북엇국을 거부당한 상우는 결국 그녀와 멀어지게 된다. 서울에서 강릉으로 내려오면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다시 서울과 강릉의 거리만큼이나 멀어져 버렸다. 보리밥이 관계의 시작이었다면, 북엇국은 관계의 균열, 끝남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봄날은 간다’는 소리로 만들어 가는 영화다. 사운드 작업을 하고, 그렇게 소리로 공감하고, 흥얼거림으로 교감하고, 서로의 소리에 반응한다. 상우의 차 안에선 은수의 방송 소리가 들리고, 빗소리엔 떠나버린 상우의 소리가 녹아있다. 이 소리의 영화 속에서 만나는 음식의 의미는 어찌 보면 아주 작은 부분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의미의 크기가 어떠하든지 ‘음식’이라는 아이콘을 클릭하면서 영화를 보면 분명 더 맛있는 감상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여유로운 주말에 뽀글뽀글 라면 끓는 소리를 들으며 ‘봄날은 간다’를 감상해 보는 것, 지나친 궁상은 아닐 것 같다. [영화가 맛있다/강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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