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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흐른다는 것, 박경리 <표류도>

두 개 섬이 하나가 될 수는 없지만, 함께 흘러갈 수는 있으니

삶에 주어진 선택지에서 치열하고 진지하지 않았던 순간이 없는데, 돌아보면 모든 것이 공중에 흩어지듯 공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과거 우리가 절실히 바랐던 무언가가 환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주어지지 않은 것들을 가졌다 느꼈다가 한낱 꿈이었다는 사실을 온 감각으로 깨닫는 순간. 특히 그 공허함의 한 조각이라도 나눌 이 없이 홀로 그것을 바득 바득 씹어야만 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고독해진다. 소위, '현타'다.





박경리의 <표류도>는 이런 인간 존재의 '현타'를 매우 현실적으로 끌어냈다. 물론 극적 요소가 적은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사를 움직이는 불륜이라는 소재는 눈길을 잡아 끄는 섹시한 요소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불륜에 스포트라이트를 두지 않는다. 불륜은 주인공 현회의 내면을 밝혀 주는 배경이 될 뿐이다.


전후 모든 것이 새롭게 태동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주인공 현회는 전쟁 중 동거하던 연인 찬수를 잃고, 사생아 '훈아'와 함께 살아가는 다방 마담이다. 내노라하는 대학을 나왔음에도 다방 마담을 하며 끼니를 이어가는 그녀의 아픔과 설움에 대해 소설은 동정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살아있고 생을 살아가는 그녀를 관조적인 시선으로 조망한다. 그녀는 다방 손님인 유부남 상현을 만나 애정을 나눈다. 소위 말하는 '불륜'이다. 기자이자 신망있는 집안과 결혼한 그와 감정을 나누면서 그녀는 사랑의 기억을 돌이키고, 생생한 사랑의 기쁨을 맛본다.


이런 매력적인 소재를 바탕으로도 소설은 그네들의 러브 스토리보다 현회 내면의 흐름에 주목한다. 그녀는 유부남인 상현을 마음 깊이 사랑하면서도 스스로를 절제한다. 시작부터 새드 엔딩을 준비하고 스스로를 위해 그 감정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등, 애정 앞에 정직하고 진실된 그녀지만 현실을 벚꽃 휘날리는 감상으로 오인하지는 않는다. 전쟁으로 애인을 잃음에도 꿋꿋이 피란 생활을 견뎌내고 가족을 짊어져야 하는 삶의 사명을 감내하는 그녀는 애정이라는 감상에 흠뻑 빠져들어가 삶을 좌지우지하기엔 너무 무거운 짐을 이고 있는 나뭇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그가 이혼을 이야기하며 결혼을 하자 할 때도 그녀의 감정은 온전치 못하다. 본인의 세계에 비추어 볼 때 상현이 그녀와의 사랑으로 삶을 좌지우지하며 그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아내, 아이)를 내려놓는 것이 쉽게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


드라마와 다른 우리네 삶처럼, 사랑에만 한껏, 풍덩! 빠져들고픈 순간에도 삶 속 다른 문제들은 잔인하게 머리를 든다. 엄마의 잔소리와 남동생 현기의 가출, 방황은 물론, 연애 소문을 들은 상현 본처와 지인들의 경멸 어린 시선과 어줍잖은 조언들. 그리고 다방 레지(여사원) 광희가 짝사랑에 실패하며 이어지는 방황과 자기 파괴적인 행동 등, 모든 것을 무시하고 포기하며 살아낼 수 없는 현회는 이 모든 게 무겁기 짝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짐은 무거워져가는데 그녀가 편안히 기댈 수 있는 어깨는 없다. 머리를 놓이고 싶은 상현의 어깨는 공식적으로 그 아내의 몫이기 때문에 그녀는 점점 이 엉켜진 관계에 반발심을 갖는다. 그럼에도 상현은 한결같이 <사랑>을 말한다.


그녀는 번뇌한다. 그의 사랑과 그녀의 현실은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것이라는 사실에 스스로를 가둔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분에 넘치는 애정보다(물론 모든 것이 동반되면 좋겠으나) 삶을 함께 걸어갈 수 있고 함께 걸어갈 의지가 기꺼이 있으며, 그녀의 세계를 이해하며 그것을 짓밟지 않는-무릇 연인들이 갈망하는 '위아더원'이 아닌 <둘>로서 같이 나아갈 수 있는 관계일 것. 치열한 사랑과 지난한 삶 사이, 닿을 수 없고 지나치게 먼 간극을 쉽게 감내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애정은 충만하나 공감이 부족했던 그들의 빈 사랑 아래, 부침이 많았던 현회의 생활에서 그녀는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상현의 사랑이 극에 이르러 상현이 본처에게 이혼을 제안한 그 무렵, 감정과 현실 사이 괴물이 된 그녀는 본인을 창부로 취급하며 모욕적 언사를 던진 단골 손님에게 무심코 꽃병을 던지고, 우연적으로 살인자가 되었다. 상현이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해 그녀는 1년 간 복역한 뒤 출소하지만 딸 훈아는 자동차 사고로 죽어버렸다고 한다. 현실에서도 애정 그 무엇으로도 의지할 곳이 없어진 그녀는 스스로의 존엄을 파괴하고자 방황하고 상현은 헌신적인 자신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는 그녀를 견디다 못해 헤어지게 된다. 그녀의 곁에 있던 죽은 연인의 친구 환규의 지극한 간호와 더불어 그녀는 본인의 고독을 읽고, 스스로의 삶을 우연 혹은 운명적인 것이 아닌 <현실>과 <고독>의 중심에 놓는다. 그렇게 현회가 회복에 접어들며 소설은 막이 내린다.





인간은 모두 고독하다. 고독하다는 감정과 현실적 요소들 사이 균형을 잡아가며 살아가는 태도는 나로서 살기 위해, 그리고 내가 밥을 먹고 육신을 꾸려 나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 현회도, 상현도, 이 소설에 나오는 대다수의 인물들은 고독하게 표류하면서도 균형을 잡으려 지독히 번민하는 섬들이다(소설의 제목이 '표류도'인 이유다). 균형을 잃은 섬들은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게 되며, 부유한 모든 섬들은 합쳐질수도 떨어질 수도 없다. 고독은 인간의 숙명이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관계에서의 행복의 깊이, 그리고 내 삶의 내용은 달라질 수 있다.


하나의 섬이 되어 완벽하게 고독을 잊은 존재는 없다. 우리는 그저 함께 흘러갈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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