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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적한 휴머니즘 <나의 아저씨>

스포일러와 뒷북에 주의하세요

드라마를 좋아하세요? - 오죽 좋아하면 아침 드라마까지  챙겨 봅니다.


정말 최소 한 해에 하나씩의 인생 드라마가 있었다면, 기억은 아스라할지어도 나는 적어도 30편이 넘는 드라마를  눈물과 웃음, 긴 여운으로 소화했을거다. 나는 노희경 작가의 일상성과 극도로 섬세한 감정묘사를 좋아했다. <도깨비>나 <별그대>처럼 비현실적 캐릭터보다 찌질하고 부족함이 가득한 인간미 가득한 캐릭터를 사랑하고, 그 위 관계라는 끈들이 얽히고 섥혀 사방으로 진동하며, 등장 인물의 성격(크게는 본질)이 자연스럽고 천천히 변해나가는 전개를 좋아한다.


올 봄은 퇴사와 집 계약, 다양한 이슈가 혼재하며 한 달 가량 드라마를 끊고 살았다. 배우 감우성과 김선아의 섬세한 감정 연기로 그려낸 SBS <키스 먼저 할까요> 이후 확 끌리는 '볼 꺼리'가 없었기도 했다. 쓸데없이 특이한 취향에 다들 좋아하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도 스킵했다-세상에는 손예진처럼 예쁜 누나가 밥까지 잘 사주는 비현실적 설정이 딱히 마음에 닿지 않은 이유도 있겠다. 연이은 야근으로 깊게 지친 채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대다, 평소 너무(심하게) 좋아하는 방송인 유병재가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작품으로 언급해 특정 사이트 회원들에게 키보드 뭇매(?)를 흠씬 맞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아저씨>에 닿았다.


나의 아저씨는 전방 1km안에 하나씩은 존재할 법한 캐릭터, 특히 30대 후반부터 40대 중년까지 영한 아재들을 주로 담았다-그래서 나의 '아저씨'일까?. 지극히 투박하고 평범하지만, 이들이 마주치는 사건과 사고는 결코 시시하지 않다. 실로 평범한 인간이 ‘드라마 같은’ 사건을 맞이할 때, 평범한 사람들의 반응은 예상한대로 평범하지 않다.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종잡을 수 없는 반응들로 매우 솔직하게 인간을 표현한 ‘나의 아저씨’의 군상들이 매력적인 이유.  


재직 중인 회사 대표와 아내가 바람을 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알고 나서도 현재 삶의 맥락을 부셔내고 싶지 않아 꾸역꾸역 진실을 감내하며 모른 척 ‘괜찮다’며 살아가는 동훈, 촉망 받던 신예 영화 감독에서 한 번의 실수로 미끄러져 청소방을 하는 동생 기훈과, 발연기로 촬영장에서 매번 감독의 몰매를 맞는 신예 여배우. 딸의 결혼식장에서 축의금을 몰래 빼돌리기도 하고 동생과 함께 일하는 청소방에서 매일 농땡이나 피우는 철없는 장남 상훈과 홀로 삼형제를 키워낸 그들의 어머니. 그리고 어린 시절 집으로 찾아와 할머니를 때리던 빚쟁이를 칼로 찔러 죽인 뒤, 그의 아들에게 금전과 마음의 빚까지 짊어진 채 지옥 같은 삶을 살아내는 지안. 농아인 할머니를 단칸방에 모시며 빚을 갚기 위해 낮에는 동훈의 팀 경리부터 저녁 주방 보조까지 닥치듯 돈을 좇아 살면서 온기 없이 돈만 좇아온 그녀까지 이 작품의 캐릭터들은 분명하게 부족한 구석이 있다. 임원(30대 폭풍승진 본부장 등?)과 신입사원의 러브라인이나, 재벌과 서민의 애정은 없다. 무언가 하나씩 꼭 부족한 '찌질한' 이들이 한 데 모여 끈적하면서도 뜨끈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데 그 온기, 심상치 않다.


‘이번 생은 글렀어. 다들 그렇게 살지만’ -  동훈은 모범 답안처럼 주어진 대로 차근하게 살아온 자신에게 사고처럼 부딪힌 모든 사건들이 낯설다. 사회가 따라오라는 대로 꾸준히 잘 따랐고, 잘 살지는 못해도 그럭저럭 산다고는 믿었다. 그 와중 갑작스레 벌어진 아내와 대표이사와의 불륜 사실과 사내 정치의 중심에 휘말리며 매 순간을 ‘변주’로 살아가는 이들을 본다. 동훈이 생각한 중년 남성의 답, ‘희생’이 아닌, 기만과 위선, 거짓으로 삶과 사람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동훈은 견딜 수가 없다. 그는 딜레마 같은 세계에 오롯이 존재하는 자신이 불쌍하다. 그래서 매일 동네 기찻길 앞, 외로움과 구역질 섞인 눈물을 토해낸다. 그리고 마치 외우듯, 스스로에게 되뇐다. ‘아무것도 아니다’


대표이사는 내내 거슬리는 동훈을 내몰기 위해 지안을 돈으로 매수, 동훈의 핸드폰에 도청을 심어 지안에게 실시간으로 그를 감시토록 한다. 지안은 하루종일 도청을 들으며 동훈의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가고, 자신의 아픔과는 다소 모양이 다른 동훈의 애처로운 삶에 공감하며 이사에게 등을 돌린다. 보통 본인이 아플 땐 남의 고통이 별 것 아닌 듯 보이곤 하는데, 불길 속에서도 내 아픔을 내세우지 않고 타인의 아픔까지 떠안고자 하는 동훈의 견고하고 자상한 태도에 지안은 감시가 아닌 애정의 차원으로 그를 지켜보게 된다. 나아가 지안이 사람을 죽인 사실을 알고도 동훈은 ‘나 같아도 그 때 그랬을 거야’며 사실이 아닌 맥락을 읽고, 그녀를 이해하려 한다. 지안은 점점 그에게 마음이 기운다. 살며 경험해보지 못한 한 인간의 이유 없는 호의가 어렵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동훈의 형제와 친구들이다. ‘후계 조기축구회’라는 타이틀 아래 모이면 차라는 공은 안 차고 매번 들입다 술만 마셔대는 평균 50의 다소 한심한(?) 동네 아저씨들. 이들은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심지어 아무 일이 없어도 동창이 운영하는 술집 ‘정희네’로 향해 매일 술을 나눈다. 얼큰하게 취하기 위함이라기보다 술을 핑계로 얼굴을 보기 위해 모이는 사람들 같다.

 이들은 지안의 안전한 귀갓길을 위해 아무 이유 없이 귀갓길에 함께 하고, 외진 곳에 있는 지안의 집 치안이 걱정된다며 옆 주택에 사는 조기 축구회 막내에게 틈틈이 지켜보라며 당부를 전한다. 그저 동훈이 마음을 쓰는 부사수라는 자격으로 결격사유 제로, 지안이 ‘후계 패거리’에 들었다며 좋아한다. 그녀는 적 없는 호의가 어색하면서도 동훈과 ‘후계 조기축구회’가 자꾸 마음에 닿는 자신을 본다. 이성간 혹은 부모-형제간의 사랑이 아니다. 어딘가는 결여된 인간 존재의 틈을 메워줄 수 있는 더 큰 가치이자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성스러운 가치. 요즘 드라마에서는 쉽게 얘기하지 않는 공동체의 선, 바로 ‘연대’라는 감정이다.  


혹자들은 동훈과 지안의 관계를 러브 라인이라 말한다. 큰 틀에서 보자면 ‘연대’도 사랑의 일종인지라 아주 거리가 멀진 않다만, 과연 이들의 관계를 단순히 남녀간의 애정으로 볼 수 있을까. 동훈과 지안은 서로가 가진 삶의 지리함을 동정하면서 시작, 서서히 인간애의 차원으로 넓혀간다. 어린 지안은 이것이 이성간의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숙한 동훈은 자신의 마음이 이성을 향한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게 둘은 다른 차원의 사랑으로 서로를 위로한다.  


<나의 아저씨>에는 남들 사는 만큼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나'보다 역할이 앞서는 우리 삶의 무거움이 있고, 그 중압감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오랜 동네지기들과 아지트이자 회복의 공간인 ‘정희네’가 있다. 어찌 보면 이 드라마는 흥행 공식에서 벗어난 요소가 많다. 러브신도, 액션도, 극적인 성공도 없다. 다만 진짜 삶과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한정된 편당 시간, 광고와 PPL, 시청률이라는 허들을 넘어야만 하는 요즘 드라마에서 휴머니즘을 말하기란 정말 어렵다. 흥행 요소를 꾸역꾸역 넣다 보면 삶의 찌질함과 역설은 빠지고, 환상적인 동화속 이야기가 펼쳐지기 마련이다. 물론 비현실적인 설정에서도 시선을 잡아끄는 작품이 많다만, 넘쳐나는 동화속 이야기 속 왠지 사람 사는 냄새 그득한, 엄마의 집밥처럼 슴슴하고 담백한 맛이 그리웠다. <나의 아저씨>라는 웰메이드 작품이 귀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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