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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수, 인생

이십 대의 마지막 태풍이 지나간 뒤



| 왜 근데 올해 결혼 안 하고?'

| 올해 아홉수니까 피해야지. 그래서 내년 1월에 잡았어'


올해 초 결혼을 앞둔 친구와의 대화. 올해 꽉 찬 이십 대에 들어선 그녀는 꿈에 고대하던 프로포즈를 받으며 본격 '길일'을 잡는다며 동분서주했다. 어제며 오늘이며 '결혼 성료'에 열광하던 그녀는, 어쩐지 올해가 아닌 내년 1월로 날을 잡았다. 그녀 나이 스물아홉, '아홉수' 때문에. 


| 아니 사주 보시는 분이 그러잖아. 올해 아홉수만 피하면 재물운도 자식운도 주절주절...


 일생의 꿈이 현모양처인 그녀를 가로막은 강력한 '아홉수'는 도대체 무어길래 인생의 통행금지 같은 역할인 건가? 게다가 아홉수는 여느 미신보다도 근거도, 기준도 없다. 아홉수는 만 나이 기준이다, 양력 기준이란 사람도 있고. 여자와 남자는 다르다는 등 포털 검색 결과부터 육교 위 용한 돗자리 슨생님까지 무엇 하나도 명확하지 않다. 기원도 효력도 기준도 알 수 없는 이 '아홉수'가 무어길래.



어느 순간도 지난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나의 '아홉 수' 


나에게 찾아온 아홉수라. 굳이 무언가를 아홉수로 정리해 말한다면 보통 재물이나 건강 상의 변화가 있다는 본의와는 다르게 거나하게 몰아친 감정적인 태풍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오춘기'.

 

10대의 나는 사춘기를 건너뛴 소녀였다. 감정적으로 큰 탈 없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친 것은 부모님에게는 한 숨 크게 돌린 다행 중 하나였을 순 있어도, 나에겐 아니었음을. 감정적인 시련 없이 시대가 주는 그대로를 의문 없이 받아들이던 나의 물렁한 자아는, 잃음보다 무난한 얻음이 익숙했던 10대의 시간과는 달리 잃어버리거나 좌절하는 일에 크게 감응하던 20대의 상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상실감과 회의감, 나아가 좌절하고 무너지는 나에 대한 무력감, 너는 지금 도대체 무엇이 필요한 인간이더냐- 나는 마치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나는 때늦은 감정의 공격적인 도전에 전략 없이 대항했고, 그 결과는 깊고 진한 우울로 이어졌다. 

10대의 우울감은 보통 삶의 배경이 깊지 않아 감당하기에 비교적 얕은 것일 수 있겠으나,  그때와 비교할 수 없는 희로애락의 빈도와 깊이를 지닌 20년을 묵은 소용돌이는 어쩌면 10대의 그것보다 몸집이 곱절로 커져 있었으리라. 다쳐보지 않아 왜 엎어지고 왜 살갗이 찢어졌는지,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 모르는 아이처럼 나는 온몸으로 그 우울을 맞았고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엉엉 울기만 했다. 


20여 년을 묵어 더욱 치명적으로 업그레이드된 '오춘기'에 부딪힌 검정 빛 나의 스물아홉. 특급 태풍의 맹렬한 기세로 다가온 그 오춘기는. 아직 떠나기엔 아쉬운지 격일로 적당량의 비를 뿌리는 중이다. 물론 가끔 '아 씨 나 여기 있어 무시하지 마!!!!'라고 존재감을 과시하며 불쑥 호우주의보를 남길 때도 있다만.

옳은 방법도 처방전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댈 수 있는 나무까지 없었지만, 모든 부재가 이 시기를 오롯이 온전하게 홀로 겪어 나가기 위한 좋은 배경이 아니었을까. 망설여지는 것과 낯선 것들에 머뭇거리지 않고, 스스로 '나답다'라고 규정한 과거의 모든 것들을 풀어 다시 조립해보는 등 사브작대며 움직이기 시작한 나를 보면 실제로 터널 한가운데는 저 멀리 멀어진 듯하다.


말 그대로 '아홉수' 인지, 스물아홉 번째 해가 저물어가는 요즘에는 어딘가 빛이 있는 듯도 싶다-혹은 나 스스로 그 숫자에 무의식적으로 의미를 부여한 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태풍이 지나간 뒤 


아직도 진짜 '아홉수'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또 그것의 위협이 내가 계획한 무언가를 뒤흔들 만큼 어마한 것인지도 정말 모르겠다. 다만 내게 다가온 감정선의 태풍을 '아홉수'로 끼워 맞춰본다면, 그것은 어마 무시한 영향력으로 존재해 진짜 신경 써야 하는 무언가 일 수도. 


돌이켜본 일 년 여의 시간은 단지 '위해'였던 것 같지는 않다. 어르신들이 쉬이 하는 '지나고 볼 일이다'의 함의처럼, 하이라이트를 지나 내 삶의 또 다른 막을 위한 내적 순환의 시간이었길 바란다. 

열대의 에너지를 잔뜩 품은 거친 태풍이 지난 후, 바닷속이 엉망으로 뒤집히고 다시 맑은 물로 순환이 되듯, 거칠었던 지난 시간들은 다가올 시간을 향해 나를 조금은 더 맑고 단단한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건 아녔을는지. 혹은, 그렇기를 바라며!



‘주역’에서 9는 양(陽)을 상징하는 길한 숫자다. 해서 9월 9일은 양기가 거듭됐다고 해서 중양절(重陽節)이라 한다. 또 9가 양이기 때문에 하늘 역시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나뉜 구천(九天)으로 이해되곤 하였다. 흔히 ‘망자가 구천을 떠돈다’고 할 때의 구천이 바로 이 아홉 하늘인 것이다. (중략)
그런데 이런 긍정적인 숫자인 9가 왜 조심하라는 부정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일까? 이것은 가득 찬 뒤에는 반드시 새로운 변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시작에 앞선 경건함, 그리고 이를 통한 진일보가 ‘9=조심’의 관점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 '왜 ‘아홉수를 조심하라’고 할까?'지현스님, 한국일보 201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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