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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 이사

5년, 해묵은 감정과 기억들이 잔뜩 녹아있던 정든 집을 떠났다. 참 오래도 살았다.


어르신들이 하는 말씀이지만 집도 공간도 정말 인연이 있나보다. 양재와 송파 언저리의 집들을 훑어보고 전세대란 속 소박한 예산에 잔뜩 초조해하다가 부동산에서 조금 비싸지만 오늘 난 매물이라며 이 집을 보여줬고, 집을 확인하자마자 괘념치 않고 '계약할게요!'를 외쳤다. 억 소리가 두번 이상 나는데도 생각해보면 참 무식한게 용감했다. 눈에 쌍라이트를 켜고 하자가 어디있는지 문제는 없는지 살펴봐도 부족할 상황에 양쪽 눈에 하트를 켜고 너무 좋다며 댕댕댔으니. 집주인도 좋은 분이기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속이기 딱 좋은 타입.


옷을 위한 방을 만들고싶지 않았고, 휴식 공간과 공부 공간과 친구들과 어울리는 공간을 완벽하게 분리했다. 원룸 시절 가장 별로였던 부분이 휴식과 수면과 공부와 독서와 탈착의와 TV시청과 식사와 수납이 혼재된 방에서 나는 당최 무엇을 해야하는지 늘 배회했었던 탓이다. 자리를 찾지 못하고 맴맴 돌던 삶을 차곡차곡 개어 본래의 역할을 부여한 서랍에 담아둔 느낌이다. 사는 모양이 깔끔하고 담백해졌다. 


사람이란 간사해서 넓직한 공간에서 다시 좁았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인테리어 꽤나 한다는 오늘의 집 리뷰어들을 보면 공간의 크기에 상관없이 예쁘게, 지혜롭게 기능을 부여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데 나는 공간을 보는 시선이 미숙하기도 했고, 사회 초년생이 피땀눈물로 사회 생활에 적응한다는 미명으로 내 삶의 환경에 참 무심했다 싶었다. 나는 나를 둘러싼 생활의 맥락이 바뀌는 걸 꽤나 싫어하는데, 곡선없이 안정된 삶의 선상에서 변주는 매우 필요한 일이었다. 좋은 선택이었건 나쁜 선택이었건 


사회 초년시절부터 살아 익숙해진 분리형 원룸에서 꽤나 넓은 방 두개, 큰 거실의 집으로 이사를 오니 좁은 공간에 익숙한 내가 뭔가 우주 한가운데 퉁 떨어진 사람마냥 어찌할 줄 모른다. 이전 거주자가 남긴 켜켜한 시간의 냄새도 아직 뭉근하게 남아있다. 사람이 남긴 향기는 입주청소나 막막 문질러낸다고 닦이는 게 아니라 그저 시간이 해결해줄 일이다. 언젠가 이 집에서 내 냄새가 잔뜩 배어나오는 날이 있겠지.

만나서 반가워, 새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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