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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하얼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의 궤를 벗어나지 못하고

(주의1) 스포를 아주 잔뜩 포함한 지극히 개인적인 아마추어의 의견입니다

(주의2) 아쉽다고 말하지만 매국노가 아닙니다 대한독립만세 코레아후라!



죽을때까지 읽어도 좋을   권의 책을 꼽으라 하면 여지없이 김훈 <현의 노래> 꼽는다.


김훈의 소설은 명료하면서 수려하다. 인물의 심리 묘사가 짧은 호흡으로 넓게 이어지며 문장 하나 하나가 인격을 섬세하게 직조해 어느새인가 내가 그의 넋이 되어 있다. 삼백만가지 고난을 극복하고, 명예와 신념으로 한 치의 오답 없이 살아갈 듯한 2차원같은 위인이 가족의 죽음에 애달파하고 어려운 전투에 선택장애(?)를 겪거나 잠자리에 들고 술을 마시는 인간성을 지닌 캐릭터가 된다. 심지어 전작 <달 위에서 달리는 말>에서는 엄청난 신화까지 엮은데다 유일무이한 '전지적 말인칭 시점'은 다른 세계에 와있는 듯 황홀함까지 주었으니.  

 

화제의 신간 <하얼빈>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대단한 흡인력으로 단숨에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픽션을 더해 신비가 한 겹 벗겨진 청년 안중근은 국사책의 사진에서 벗어나 3D가 되어진 모습이다. 사냥으로 노루를 쏘던 포수, 본래 호국에 관심이 많고 몇 달씩 밖으로 돌던 청년 안응칠. 그런데 이상하다. 어쩐지 3D로 만들어진 캐릭터의 움직임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


tvN <미스터 션샤인>을 안중근화하여 소설로 만든 느낌이었다. 청년 안중근 의사의 시간을 담고싶었다기엔 시대의 서사가 너무 깊고, 안중근 페르소나가 묘사되기에 주어진 반경은 다소 좁다. 포수이자 천주교도인 그는 이 범위 밖에서 더 넓게 태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청년 순국 선열로서 신성하고 거룩하다. 너무 많은 주변인들의 인격이 둘러싸여진 탓인가, 일본의 국권 찬탈부터 제국주의의 소용돌이에, 종교의 범람까지 갑작스레 몰아친 시대 배경이 그토록 복잡했기 때문일수밖에 없는가, 아니면 그를 좋아하던 나의 '쪼' 탓으로 이번 소설에서도 영웅 안중근이 아니라 영웅이 아닌 인간 안중근의 마음의 흐름을 기대했던 탓인가. 혹은 아직 정리되지 못한 가슴 아픈 역사 속, 아득하게 남은 의인이라 나뭇가지를 더하기에는 그 틈이 패이기에 너무 거룩했던 터인가.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해야겠다는 동기가, 그를 쏘아버린 동기가, 청년 안중근이 보여주는 젊음의 피는 어쩐지 역사의 흐름을 급하게 따라가는 듯 보였다.


마지막은 담백하고 깔끔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사살에 성공한 과정과 이후 심문에서, 법정에서 나눈 이야기는 선선한 바람마냥 호젓하게 흘러간다. 심문과 재판은 안중근 의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건 그리하야 비로소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는가, 악몽의 끈을 잠시라도 끊어냈는가, 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후기에서 작가는 살아남은 이들의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은 역사를 말한다. '0년 후'와 같이.


역사는 더 뱉을 말이 없고 작가의 세계는 무한하다. 새로운 안중근을 만나길 바랬던 나의 마음은 과욕이었던걸까. 책을 덮고 난 뒤 소시민의 알량한 애국심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데, 과연 이 감정이 맞는가를 돌아본다.




작가의 말에서 그는 이렇게 언급한다.

"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소설로 써보려는 것은 내 고단한 청춘의 소망이었다. (중략)나는 안중근의 짧은 생애가 뿜어내는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했고, 그 일을 잊어버리려고 애쓰면서 세월을 보냈다. 변명하자면, 게으름을 부린 것이 아니라 엄두가 나지 않아서 뭉개고 있었다.
2021년에 나는 몸이 아팠고, 2022년 봄에 회복되었다. 몸을 추스르고 나서, 나는 여생의 시간을 생각했다. 더이상 미루어 둘 수가 없다는 절박함이 벼락처럼 나를 때렸다. 나는 바로 시작했다."


책 제목처럼 노래같이 흐르던 우륵과 이순신 생의 선율은 선명하게 번뜩이는 세계였고, 그 길로 나는 김훈의 덕후가 되었다. <달 너머로 달리는 말> 또한 놀라움 그 자체다. 나는 여전히 작가의 덕후고, 놓쳐 읽지 못한 <저만치 혼자서>도 독파하는 중이다. 오랜 팬심이 만든 오해 서린 질문일 수 있지만 이번 책에서 작가가 스스로가 열망했던 '청춘의 소망'을 개운하게 이뤄냈는지는 물음표가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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