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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을 찾은 자 vs 행성을 죽인 자

마이크 브라운 <나는 어쩌다 명왕성을 죽였나>


어렸을적부터 '덕질'을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젝스키스와 신화 팬들이 주류였고 살짝 3류 그룹으로 GOD 팬들이 있었다. 어릴적 내 무리에는 신기하게도 GOD 팬들이 많아서 그 사이에 어물쩡 껴들어가 와와대며 드림 콘서트를 쫓아다니고, 노란 풍선을 짓밟는 만행을 펼쳤지만, 누군가가 "정말 '오빠없인 못살아'의 마음이었는가"라 물어본다면 솔직한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난 친구들을 사랑했지, 오빠는 사실 있으나 없으나 내 삶의 큰 동요가 있는 인물들은 아니었던 것. 지금도 같다. 관심이야 있지만 '덕질인가' 싶은 무언가는 없어 괜히 주변부를 서성대고, 어느 하나의 영역을 주구장창 파대는 친구들을 보면 묘한 경외감이 들었다. 자기 소개서를 술술 써내려가다 '취미와 특기' 란을 마주할 때 괜히 '내가 그냥 막 좋아하는게 있던가'하는 이상한 패배감, 덕질 없이 산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왜 나는 명왕성을 죽였나(How I killed Pluto and Why I had it coming)>의 저자 마이크 브라운은 행성 덕후다. 쉬이 제목만 보면 '왠지 천문학에 대한 전문용어나 학술정보가 너무 많으니 믿고 거르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만 행성이 죽든 살든 누가 죽였던 살렸던간에 나와 연관이 1도 없는 명왕성이 수금지화목토천해명에서 빠진다는데 생업에 바쁘디 바쁜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가 관심이 갈 일이 있나, 몇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정말 재밌게도 이 이야기는 진심으로 왜, 어떻게 명왕성을 죽였는가에 대한 살인... 아니 살행성(?) 기술서 및 변명서이자, 이 시기 마이크 브라운의 생활을 담은 재미난 연대기이다. 이런 내용이 재미있을리가 있나 싶겠지만 정녕 마지막 줄까지 모두 흥미롭다. 부록 제외 415페이지라는 방대한 페이지를 이틀만에 해치운(?) 데에서 나아가, 보통 에필로그와 감사의 말, 역자의 말까지 다다르면 지칠 법도 한데 디저트를 먹는게 아닌 메인 디쉬를 먹는양 맛깔나게 먹어치울 수 있다. 스릴 넘치는 추리 소설도 아닌게 신개념 괴물이 등장해버렸다.


천문학계에서는 굉장히 큰 이슈였던 '명왕성 제명'의 파동을 만든 장본인 마이크 브라운은 천문학을 업으로 삼는 연구자이자 교수다. 근데 말하자면 좀 괴짜다. 다른 이들이 현대화된 컴퓨터와 프로그래밍을 통해 천문과 우주의 온갖 가설들을 검증해 나갈 때, 다른 일 하느라 바쁜 네임드 천문학자들이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에게 내주었다는 '별찾기', 그는 즉 모래에서 바늘을 찾고 있었다. 제 10의 행성을 찾던 마이크의 연구진들은 최신 연구수단만 고집하기보다 모든 수단들을 동일 선상에 두고 과거의 연구논문들과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구식 망원경까지 활용해 고집스럽게 행성을 찾아댄다.(예쁜애 옆에 예쁜애 괴짜 옆에 괴짜) 재밌는 사실은 그렇게 행성들을 찾아댈(?) 때, 마이크 개인의 우주도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동료 다이앤과의 연애와 결혼, 그리고 딸 릴라의 출산과 육아까지 그는 그는 우주의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며 또 자신의 우주에서 새로운 변화를 맞으며 자신만의 태양계를 만든다.


쉽지많은 않다. 아내와 분담한 육아 R&R 분장을 철저하게 지켜가며 미션들을 클리어해나가야 하는 점은 우리네 유부월드라면 당연히 공감할테고, 남의 공을 가로채고자 나타난 하이에나(타국의 모 천문학자)와의 신경전 등등, 여러 고난과 몰두를 거쳐 어렵게 발견해낸 행성에 대한 논문의 맺음 반점을 찍기까지 너무나도 방대한 굴곡에 마주한다. 그리고 여느 곳이건 그러하듯 고구마의 하이라이트는 역시나 정치성을 띈 집단이다. 그는 행성의 정의가 명확하게 그어져있지 않았기에 그가 찾은 '제나'가 행성으로 범주화될 수 있는가에 대해 구분선을 긋지 않았다. 그러나 국제천문연맹은 놀라운 논리 비약으로 제나를 포함한 3개의 천체를 더해 12개의 행성을 만들어버리려 한다.

그는 어쩌면 100년만에 등장한 행성 발견자로서 그럴싸한 지위를 얻게 될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리와 신념에 근거해 '연맹이 제시한 모호한 기준으로 행성이 12개가 된다면 200개 이상의 천체들이 모두 행성이 되어야 하는 일이다'며 주변 반대파 학자들과 합세해 극렬히 이의를 제기한다. 앞으로 발견할 무수한 행성이 포함될 수 있고, 이미 발견되었으나 포함되지 못한 왜소행성 중에서도 충분히 행성으로서의 지위를 얻을 수 있는 모호한 기준이 생긴다면 연구와 진리는 길을 잃어버릴 것이다. 무엇도 진리가 되기 힘든 빈칸 투성이인 아득한 우주의 영역 안에서, 그는 신념으로 존재했다.


그가 찾은 '제나'는 더이상 명왕성이 아닌 134340과 함께 왜소행성 범주로 향했다. 자신이 몇년간 공들여 찾은 행성들이 주류가 되지 못함에 대한 불편함 없이, 그의 학자적 애티튜드는 그 자체로 빛났다. 언젠가는 충분한 자질을 갖춘 9번째 행성 후보를 찾길 소원하면서 그는 다시 탐구자이자 아빠, 그리고 그 자신으로서의 길을 걷는다. 딸 릴라가 천문학 강의를 듣는 나이가 올 때, 혹은 결혼을 할 때, 혹은 아이를 낳을 때, 그 언젠가쯤을 생각하며.



 우주는 인지와 미지의 영역 중 어떤 부분이 더 큰 지 조차 가늠할 수 없이 아득하다. 인간이 정한 의미는 우주에게 그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우주는 무한하고 오직 인간은 인간을 위해 의미를 내릴 뿐. 명왕성은 죽었고 이제는 행성을 암기할 때 다소 어색한 '수금지화목토천해'가 되었지만 명왕성이라는 이름은 134340이 되어 그 자리 그대로 궤도를 흐른다. 마이크 브라운에게 필요했던 건 명왕성이거나 134340이거나가 아니다. 또 학자로서의 명예나 어떤 목적도 아니다. 오직 자신의 '덕질 영역'이 인위적이고 비논리적인 접근으로 해쳐지지 않길 바라는 순수한 마음이었을 것. 자신이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업과 생활이라는 행성들이 조화롭게 공전하는 그의 우주, 순수한 신념과 태도로 살아가는 마이크 브라운의 시간은 실로 근사하고 별처럼 반짝인다.


교복을 입고 음방을 찾아 열렬히 응원가를 외치는 어린 팬들의 덕질이 내심 부러운 이유는 지금은 잊어버린 순수한 마음이 빛나기 때문이다. 마이크 브라운의 책은 같은 시간을 흐르고 있는 지구 반대편 항해자의 우주에 작은 크레이터를 만든다. 어른이 된 나는 진지하고 순수하게 시간을 흐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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