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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효율과 이윤에 의해 굴러가는 세계. 다른 의미로 쓰여진 휴머니즘과 행복

압도적이다. 400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소설은 단시간에 나의 세계로 흘러들었다. 


판이하게 달라진 미래 세계에서 달라진 가치체계, 규율과 시스템 하에 달라진 휴머니즘에 대해 다루는 소설이야 정말 많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특별한 이유는 극한의 효율 관리, 사회 안정을 중심으로 재편된 '개인의 삶'에 대한 시선이 옳고 그른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던지지 않는다.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새 시대는 모체가 한둘의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자라며 다시 그 아이가 모체가 되는 사회가 아니라, 실험실에서 대량 수정된 아이들이 각 계급에 따라 정해진 능력을 키워주는 약물을 넣고, 그것을 극대화해주는 교육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엄마, 아빠가 사라진 사회에서 개인은 누군가에게 속해지거나 누군가를 소유할 수 없다. 아이는 실험실에서 양산되기때문에 개인은 출산이나 양육의 의무가 없고 타인 누구나와 성생활을 즐길 수 있다. 불편한 일이 생긴다면 의식을 평온하게 만들어주는 '소마'를 복용하면 된다. 기분이 답답할 땐 '전자 골프'를 치러 필드에 나가고 돌아오는 길에 알파 등급은 헬리콥터를, 그리고 낮은 등급의 인간들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계급에 속한 인간들은 더 높은 계급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않는다. 지위가 높고 소득이 높은 알파 등급의 사회적 의무와 책무를 지는 것은 오히려 불행하기때문에 베타 계급의 사람들이 더 행복하다는 교육을 어릴때부터 받아오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계급 체계와 구조는 철저한 교육과 구조 하에 진행되기때문에 이탈이 거의 없고, 세상에 나오기 전 태아 단계부터 약물과 교육으로 각 계급에게 철저하게 주입된 사상은 각 계급의 개개인들이 행복하고 안정적인 삶을 꾸릴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모두는 모두의 사람이자 모두의 삶이며, 이것은 사회 안정과 개인의 행복을 위해 최적화된 구조라고 세계의 최고 권력자는 말한다.


이 서사에 '소마'를 싫어하는 이탈자, 버나드가 등장한다. 버나드는 '소마' 복용을 지양하고 자유로운 사상을 원하지만 실험실에서 나고자란 유년의 교육 탓에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러다가 뉴 멕시코에 있는 '3세계'를 만난다. 지금의 세계처럼 모체와 양육이 존재하는 3세계와 현재 세계의 혼혈인 존을 만나고, 추악하고 자유로운 삶과 죽음의 세계를 본다. 버나드는 그 세계가 신비하고 아름다웠지만 그 세계로 편입되고싶어하진  않은 듯 보였다. 그저 자신이 보던 자유 의지의 세계가 동경스럽고 아름다워 관광하기에 퍽 좋다고 느낄 뿐 제가 머물 자리는 아니라는 3인칭의 시선이었다.


버나드는 야만인 존을 데리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온다. 존은 마냥 아름다울듯 보이던 그 세계에서 베타 등급의 스무명 남짓한 일란성 쌍둥이들을 보고, 금지서로 포함된 셰익스피어와 시들을, off 스위치를 내린 듯 아무도 관심이 없는 죽음을, 조금이라도 좋아한다면 섹스를 즐길 수 있는 '공유 사랑'의 세계를 본다. 그리곤 통제관에게 떠나겠다고 말한다.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어디서든 이방인이었고 '야만인'에 속하는 그는 원시림이 우거진 한 섬의 등대에서 머물기로 한다. 등대 근처에 밭을 갈고 경작을 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모두 가두어버리는 위험한 세계 속에서 잠시 매력을 느꼈던 자신을 스스로 채찍질하며 벌한다. 하지만 일차원적 욕망의 만족이 얼마나 달콤한지 아는 그는 이미 알아버린 그것에 대해 증오하면서도 그리워하는 역설 속에 잠겨든다. 스스로 가치를 쌓아햐 하는 자유 인간의 머릿속이란 그렇게 복잡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소설 속 세계는 그저 과학이 발전됨에 따라 만들어진 모습이 아니라 '9년 전쟁'으로 황폐화되고 사라진 사회와 국가, 커뮤니티를 다시 세우기 위해 개편된 모습이었다. 그 안의 개인들은 고통과 질병, 사고가 통제된 상태에서 최우선의 행복을 즐긴다. 고통과 번민, 혼돈의 시간 이후에 또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만날 수 없는 것과 분자로서의 활동이 끝나면 아쉬움 없이 종료되는 삶. 소설 속 통제관은 "이 사회는 영웅과 숭고함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영웅 혹은 숭고함이라는 '인간의 잠재력'을 통해 다르게 쓰여질 역사가 없다는 것이 무서울 뿐이다. 


<멋진 신세계>의 세계관을 마주하며 느끼는 이질감 또한 지금의 세계관에 학습되고 교육된 분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개인의 잠재성이 모두 잘려나간 마치 세포의 분자를 구성하는 듯한 사회의 모습은 구역질이 나면서도 어찌 생각하면 여럿이 살기에 그만한 세상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웃기게도 소설 속 '분자'가 내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어디로 어떻게 튀어나갈지 모르는 나의 잠재력을 나도 모르게 사랑하고 있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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