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게임 아닌 것의 구분에 대하여

by 이름없는 자

한동안 글쓰기를 쉬었다. 공모전 제출 기한이 다소 빠듯하여 못 쓴 부분은 이어서 쓰겠다고 했는데, 계획한 글들을 전부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번 챕터만큼은 써야 한다고 생각해서 쓴다. 글의 후반부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고 어찌 보면 가장 논란이 될만한 내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소 논쟁적인 내용을 다루는 만큼 이번 챕터에서는 양자의 입장 모두를 균형 있게 다뤄보고자 한다. 다만 필자 역시도 개인적인 의견과 생각을 갖고 있는 한 명의 플레이어인 만큼, 최대한 균형점을 맞춰서 쓰고 싶지만 자기도 모르게 한쪽 방면으로 치우친 글을 쓰게 될 수도 있다. 그러한 위험성을 감안하고 글을 읽어줬으면 한다.


종합예술이라는 말의 명과 암


흔히 게임을 종합예술이라고 부른다. 틀린 말은 아니다. 기술이 진보하고 시장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게임에는 여러 요소가 혼재하는 모습으로 나아갔다. 영화, 건축, 음향, 문학, 시각 디자인, 애니메이션, 인터랙티브 아트 등 수많은 요소가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제9의 예술로 인정받은 만화의 뒤를 이어 제10의 예술로 게임과 요리를 두고 경쟁하는 추세라고 한다. 게임을 싫어하고 우습게 보는 일부 현대인들의 시선과는 반대로 현대 게임의 위상은 가히 종합예술이라고 불릴 만하다. 현시대에 게임과 게임 아닌 것의 경계가 흐려진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현대 게임은 하나의 개념으로 좁히기에는 너무나 많은 요소가 혼재되어 있으니 '종합예술'이라는 단어 하나로 퉁쳐버리는 것이다. 현대 게임에서는 현세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디지털로 추구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러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관점을 바꿔서 생각해보자. 모든 것을 추구할 수 있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이도 저도 아닌 잡탕이 되기 쉽다는 뜻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한 가지 요소도 제대로 충족하기 어려운 데, 여러 분야를 동시에 훌륭하게 갖추기가 얼마나 어려울지는 굳이 글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모든 예술은 자신만이 추구할 수 있는 한 가지 분야가 있고 그 분야에서 홀로 극한에 도달한 매체들이다. 현 프랑스의 9대 예술 분야(건축, 조각, 회화, 음악, 문학, 공연 예술, 영화, 미디어 아트, 만화) 모두가 그렇다. 하지만 현시대 게임은 어떤가? 게임만이 추구할 수 있는 경험, 매체성이 종합예술이라는 단어 내에 존재하는가? 다른 분야에서도 동일하게 추구할 수 있는 경험이라면 게임을 해야 할 이유도 없고, 게임을 제10의 예술로 인정해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실제로 게임 내에 존재하는 고정된 내러티브가 아무리 발전했어도 노벨상을 받은 문학의 내러티브를 능가할 수 없고, 게임 속 3D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영화의 비주얼과 경쟁할 수는 없다. '영화 같은 게임', '게임도 영화가 부럽지 않다'는 식의 발언은 게임이 영화라는 매체에 품고 있는 열등감을 드러내는 표현이자, 게임이 게임만의 문법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일방통행 벽, 끊임없이 위치가 바뀌는 방 등 악랄한 난이도로 유명했던 <위저드리 4(1987)>의 4층 지도. 이런 괴악한 던전을 현대 게임에서 찾아보기는 어렵다.


수십 년 전부터 게임을 플레이해온 하드코어 플레이어나, 현직에 종사하는 다수의 게임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등 개발자들의 비판점 역시도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게임에 여러 요소들이 섞이기 시작하면서 기존 게임만이 추구할 수 있었던 규칙에 따른 상호작용을 통해 게임 내에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즉 플레이의 측면이 약화되었다는 게 공통된 비판이다. 좁은 공간 속에서 강력한 괴물을 만나며 캐릭터의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 논리적 사고를 요구하는 퍼즐, 각종 위험한 함정과 복잡한 미로로 플레이어를 조이는 던전, 수많은 단서를 추론하는 과정을 통해 목적을 어떻게 달성해야 할지 고민하게 해주는 퀘스트 등은 현대 게임에 이르러 최대한 간소화되거나 내지는 사라졌다. 가령 악랄한 퍼즐과 각양각색의 기믹으로 플레이어를 괴롭혔던, 역대 가장 어렵고 복잡한 RPG로 손꼽히는 서텍의 <위저드리 4(1987)>같은 던전을 현대 게임에서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공략 없이 이 게임을 클리어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를 통틀어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만큼 극단적으로 어려운 게임이다. 필자 역시도 클리어하지 못했다). 다수의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더 이상 수없는 실패(Game Over)를 통한 시행착오를 겪을 필요가 없다. 특히 온라인/모바일 RPG는 게임이 추구하던 문제 해결이라는 가치가 약화되다 못해 상실한 수준에 가까울 정도다.


때문에 이들은 게임 내에 존재하는 '종합예술'적 요소로 받아들여지는 부분들, 고정된 내러티브나 음향, 컷신 등의 요소들을 비판한다. 게임계에 그런 요소를 담당하는 작가, 애니메이터, 아티스트들을 두고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게임 프로젝트의 규모가 커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넣게 된 필요악 정도로 취급한다. 극단적인 경우 문예를 할 능력이 없어 게임 시나리오를 쓴다거나, 그림만으로는 먹고 살 능력이 없어서 게임 일러스트를 그린다거나, 영화를 찍을 능력이 없어서 게임의 시네마틱 컷신을 만든다는 식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정말 실력이 있었으면 자신의 분야에서 더 큰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었을 테니 굳이 게임계에 발을 디딜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아마도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역시도 누군가에게는 폄하의 대상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잇 테이크스 투(2021)>


올해 발매된 게임 중에 좋은 사례가 하나 있다. 바로 헤이즈 라이트 스튜디오의 코옵 게임인 <잇 테이크스 투(2021)>이다. 이 게임은 관점에 따라 평가가 첨예하게 갈릴 수밖에 없다. 우선 이 게임은 게임을 '종합예술'로 분류하는 플레이어에게는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 흡사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컷신, 아기자기하면서도 아름다운 아트스타일, 변화무쌍한 게임 플레이 등 여러 요소를 총체적으로 조합한 게임이다. 영화, 음향, 만화, 미술 등 여러 예술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다는 점에서 종합예술이라는 면모에 가장 부합하는 게임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의 예상으로는 십중팔구 올해 최다고티를 받을만한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게임 리뷰나 평론계에서는 이러한 '종합예술'파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플레이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이 게임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울 수 있다. 이 게임의 구조는 리듬 게임, 격투 게임, 타워 디펜스, 비행, 슈팅 등 수십 개의 미니 게임을 하나의 게임에 엮어 낸 형식이다. 하나의 콘셉트를 일관되게 밀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파고드는 게임이 아니라는 뜻이다. 기본적인 진행은 어드벤처+퍼즐 게임이라고는 해도, 난이도가 높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물론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할 내용에 있다). 주로 남녀 커플로 게임을 플레이할 것을 대상으로 하여 게임이 만들어졌고, 게임의 구조와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을 위해 기획되었기 때문이다. 다수의 퍼즐 요소는 조금만 고민하면 풀릴 만큼 직관적이며, 만약 캐릭터가 죽더라도 죽은 장소의 바로 앞에서 게임을 시작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페널티도 가볍다. 수십 년 간 다수의 게임을 플레이해온 하드코어 플레이어라면 이 게임에서 준비된 난관들이 대부분 시시하게 여겨질 것이다. 실제로 둘이서 협동하여 클리어하도록 설계된 이 게임을 혼자서 클리어하는 플레이어의 사례도 종종 있을 정도다. 그런 플레이어라면 이 게임의 깊이가 아쉬울 수밖에 없다.


현대 게임과 고전 게임의 육각형 비유


지금까지의 내용을 종합하자면 '육각형의 비유'가 가장 잘 맞아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종합예술로 분류되는 게임들이 육각형의 모든 요소를 고루 포함하고 있되 한 가지 측면에서 특출 난 분야가 없는 반면, 전통적인 플레이 측면과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에 집중한 게임들은 다른 분야는 다소 떨어질 지라도 도전/문제 해결을 통한 게임 플레이라는 한 가지 분야에서 다른 분야보다 우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문제 해결의 메커니즘도 과거의 게임들이 현재의 게임들보다 게임적 메커니즘의 측면에서 봤을 때는 더욱 어렵고 복잡한 경우가 많다. 다양한 분야를 추구할 수 없었던 시절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한 가지 분야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특출 날 수 있었던 것이다. 게임의 규칙이나 레벨 디자인의 진화는 기술의 발전과 '상대적으로' 연관성이 적은 편이다.각2) 이러한 과거의 디자인을 기술의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채택해야 했던 디자인으로 치부하는 플레이어들도 다수 있지만, 그렇게만 보기는 어렵다. 게임을 문제 해결의 과정으로 바라본다면 오히려 긍정적으로 해석해야 할 여지도 충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학술적으로 게임을 엄밀하게 구분해야 할 이유는 있는가


게임과 게임 아닌 것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게임 자체에 대한 엄밀한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대두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주장을 구분 무용론이라고 부른다. 현세대 게임은 종합예술이 되었고, 게임이 영화로 제작되거나 소설이 되고, 혹은 그 반대로 넘어가는 사례도 흔하다. 이른바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 미디어 프랜차이즈(믹스) 현상이다. 하나의 원형 콘텐츠를 활용해 다양한 종류의 매체로 변용하여 판매하는 게 유행이 된 시대다. 매체 간 경계가 흐려지고 각각의 매체가 서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현실 속에서 게임을 학술적으로 정의하고, 게임과 게임 아닌 것을 구분하는 행위의 의미가 사라졌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초기 게임학 연구방법론의 두 가지 축이었던 내러톨로지 vs 루돌로지 논쟁이 무의미해졌다는 의견도 구분 무용론의 연장선상에 있다. 현대 게임들은 너무나 복잡하고 수많은 요소가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한 가지 고정된 개념만으로는 게임이라는 매체에 대한 설명력이 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본문에서 필자는 게임과 게임 아닌 것의 경계선 상에 있는 대표적 장르의 게임들을 제시하고, 그것이 어떤 측면에서 경계선 상에 존재하는 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게임을 구분하는 게 의미 없다는 입장과 의미를 지닌다는 양자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게임을 엄밀하게 구분하자는 게임 근본주의자(근본주의라는 말에 어느 정도 비하의 의미가 섞여있다고 볼 수도 있기에 되도록 쓰고 싶지 않은 단어이나 이러한 집단을 지칭할만한 적합한 단어가 없다. 양해를 바란다)들의 주장에 따르면 게임과 게임 아닌 것의 경계선 상에 있는 대표적인 게임 장르로 총 4가지 장르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클리커, 워킹 시뮬레이터, 비주얼 노벨, 목표가 없는 시뮬레이션 게임(심시티, 심즈 등)이 그것이다.


모바일 클리커 게임 알터 에고의 게임 화면. 화면에 있는 말풍선을 클릭하면 위의 나비 모양 옆에 수치로 기록되어 있는 재화가 늘어난다.


첫 번째 장르는 소위 '클리커'라고 불리는 게임 장르다. 별다른 조작이 없이도 게임 내 재화가 늘어나고, 이를 통해 게임을 진행한다거나 아이템을 구입할 수 있다는 특징 때문에 방치형 게임이라고도 불린다. <알터 에고>라는 모바일 클리커 게임을 예시로 들면,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상호작용이라고는 그저 말풍선을 최대한 빠르게 클릭하여 재화를 얻는 것 외에는 없다. 느리게 클릭해도 큰 문제는 없다. 게임 내 재화를 얻는 속도가 느려질 뿐이고 엔딩을 보기까지 좀 더 시간이 걸릴 뿐이다. 게임의 궁극적인 목표인 엔딩에 지장은 없다. 즉, 이 게임에서는 상호작용과 규칙이 존재하며 엔딩이라는 목표도 존재하지만, 플레이어가 극복해야 할 '난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의 요소 역시도 거의 전무한 수준이다. 클리커 게임을 게임이 아니라고 보는 입장도 난관의 존재 유무에서 비롯된다. 사실상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없고 아무 생각 없이 말풍선을 클릭하여 재화를 얻다 보면 목표인 엔딩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게임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댓 드래곤, 캔서(2016)>


두 번째 장르는 워킹 시뮬레이터라고 불리는 게임 장르다.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이야기를 듣거나 단서를 찾는 등 게임 내에서 상호작용을 하지만 주된 게임 플레이 요소는 걸으면서 사물을 클릭하고 상호작용하는 정도에 그친다. 기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반쯤 조롱조로 불린다. 그저 걸어 다니면서 이야기 듣는 정도밖에 안 되는, 게임조차 되지 못한 무언가 정도의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난관의 존재도 거의 전무한 수준이다. 기존 게임이라고 불릴만한 요소가 전무한 대신 배경 그래픽이나 사운드, 시나리오 등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2016년 라이언 그린, 에이미 그린 부부가 중심이 되어 제작된 <댓 드래곤, 캔서>는 두 개발자의 실제 아이였던 조엘과의 4년에 대해서 다룬 워킹 시뮬레이터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조엘이 암에 걸려 투병하는 과정을 담은 게임으로, 아이의 죽음 속에서 플레이어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게임 내내 보여주는 충격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인해 여러 매체에서 조명받은 게임이다. 하지만 이 게임 역시도 구조적으로는 난관의 존재가 거의 존재하지 않고, 의도되었다고는 하나 게임 내에 존재하는 선택의 요소가 무의미하다는 점, 2~3시간의 플레이 타임 동안 그저 게임 내에 존재하는 고정된 내러티브를 감상하는 정도에 그쳐 게임이라는 정의에 엄밀하게 부합할 만한 작품인지 논란이 분분한 작품이었다.


<월희(2004)>


세 번째 장르는 비주얼 노벨이다. 글과 그림으로 고정된 내러티브를 감상하며, 중간마다 선택지를 골라 진행이나 엔딩이 다소 다르게 바뀔 뿐 게임 구조적으로는 텍스트를 읽고 캐릭터성을 감상하는 게 게임의 전부에 가깝다. 비주얼 노벨 에로 게임 <월희(2004)>의 경우, 배틀 시에 선택지를 넣어주기는 하지만 의미가 없는 수준에 가깝다. 가령 게임 속 네로라는 빌런과 결전에서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선택지 찍기에 불과하다. 어떤 선택지를 골라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지 게임 내 힌트가 주어지지 않으므로 세이브-로드를 반복해가며 다른 선택지를 찍다 보면 게임이 끝난다. 플레이어의 사고를 요구한다기보다는 운에 의지하는 식이다. 이처럼 전투는 형식상 구색을 맞춘 정도에 그친다. 기본적으로는 게임 속 다수의 히로인과 호감도를 쌓아 연애를 하는 게 목적이며 그 과정 속에서 캐릭터의 대사, H씬 등을 감상하는 게 끝이다. 이 게임 역시도 목표인 엔딩은 존재하나 게임 속 난관의 존재가 거의 존재하지 않으므로 사실상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의 요소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출처는 동아일보. 전등을 켜고 끄는 건 게임일까?


네 번째는 정해진 목표가 없는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대표적으로 <심시티>, <심즈>각3)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을 들 수 있다. 목표가 없으므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난관도 없다.각4) 다만 게임 내에 허용되는 규칙 하에서는 어떤 행위를 해도 가능하며, 자신의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원하는 도시나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고 비선형적인 게임의 극치다. 이러한 자유로움 덕분에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의 극치로 게임 디자인 책에서 소개되는 경우도 많다. 다만 목표와 난관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 게임을 학술적으로 엄밀하게 '게임'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지는 플레이어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심시티를 게임으로 엄밀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이유는 규칙에 따른 상호작용 만으로는 게임이라고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가령 전등을 켜고 끄는 행위를 생각해보자. 전등을 켜고 끄는 행위에는 상호작용과 규칙이 모두 적용된다. 전등의 스위치를 올리고 내릴 때마다 어떤 피드백이 들어온다는 점에서 상시로 상호작용이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고, 전등의 스위치를 올리면 불이 들어온다 / 전등의 스위치를 내리면 불이 꺼진다.라는 식으로 명확한 규칙마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등을 켜고 끄는 행위는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전등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사례를 제시하지 못하는 이상 규칙과 상호작용 만으로는 어떤 물건이나 행위를 게임이라고 부르기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위 사례들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난관이 존재하지 않거나, 내지는 달성해야 할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규칙에 따라 상호작용하며 승부를 가르거나 목표를 달성한다는 보편적인 게임의 정의에는 부합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플레이어들의 비판점 역시도 이러한 점에서 비롯된다. 퍼즐이나 괴물과의 전투, 추론 요소 등 플레이어의 능동적 사고를 요구하는 난관의 존재가 전무한데 이러한 장르의 게임들을 '게임'으로 정의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다.


게임의 정의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인터넷 댓글. 구분 무용론의 전형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출처는 하프 리얼. 학자들 간 게임의 정의에 대한 비교표. 게임 학자 / 디자이너들끼리도 게임의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의견이 갈리는 편이다.


하지만 구분 무용론에 따르면 이러한 주장은 무의미하다. 위의 4가지 사례 모두 목표나 난관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3D 그래픽을 입힌 영화나 일러스트로 도배된 소설이든 간에 이미 시장에서 다수가 '게임'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설령 게임이라는 개념의 정의 자체가 존재하더라도, 게임이라는 개념을 정의한 것은 인간이고 인간이 정의한 이상 게임의 정의에는 자의적인 측면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실제 학자들끼리도 게임의 정의가 갈리는 경우가 많다. 목표와 난관을 보편적인 게임의 정의로 가져오긴 했으나 이 부분마저도 시시비비를 가릴 여지는 있다. 가령 이 분야의 가장 고전적인 학자 중 한 명인 로제 카유아의 게임 정의에는 규칙은 존재할지언정 극복해야 할 난관이나 목표의 존재가 없다. 자발적으로 게임을 진행하면서 나타나는 불확실한 결과만이 남을 뿐이다. 따라서 게임이라는 개념의 정의는 결코 절대적 진리일 수 없다는 한계는 있다.


구분 무용론자들은 게임의 정의보다는 의미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다. 설령 게임에서 존재해야 할 목표나 난관의 존재가 없더라도 플레이어에게 좋은 경험을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3D 그래픽을 입힌 영화든, 일러스트로 도배된 소설이든 플레이어가 즐거우면 상관이 없다는 논리다. 이들에게 게임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행위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의미도 찾을 수 없는 행위에 불과하다. 엄밀하게 게임을 정의하고 게임을 구분하는 게임 근본주의자들을 '순혈주의, 교조주의'에 불과하다며 순수하게 게임의 가치를 평가하기보다는 기준에 따라 폭력적으로 게임의 우열을 가릴 뿐이라고 지적한다. 남는 것은 게임의 정의에 부합하는 월등한 게임을 하는 '우월한 나'로 귀결될 뿐이다.


구분 무용론자들의 주장은 귀담아들을 여지가 있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는 이유는 어떤 의미 있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고 좋은 경험을 줄 수 있다면 게임이라는 엄밀한 학술적 구분이 크게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가령 걸으면서 고정된 내러티브를 감상하는 워킹 시뮬레이터 <곤 홈(2013)>이나 캐릭터 간 서사와 모에 요소를 강조하고 선택지에 따라 다른 대사가 나오는 비주얼 노벨 에로 게임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2004)>같은 게임은 해당 게임을 플레이해본 다수의 플레이어에게 이건 게임조차 될 수 없는 물건이라면서 경멸이나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일부 플레이어에게는 의미 있는 플레이 경험이었음에도 그랬다. 합리적인 비판도 있지만 다수의 경우 그저 자의적으로 게임의 기준을 재단하고 해당 게임과 해당 게임을 즐겁게 플레이 해온 플레이어를 조롱하는 선에서 그쳤다.


무엇보다 위 게임들이 플레이어 사이에서 경멸의 대상이자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앞으로도 해당 장르의 게임 전부를 부정적으로 바라봐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 곤 홈이나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모두 발매 당시에 플레이어에게 게임조차 되지 못한 무언가로 취급받으며 경멸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비디오 게임'이라는 매체의 역사조차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20~30년 전만 해도 사회적으로 비디오 게임에 대한 인식은 아이들이나 하는 유치한 오락거리 내지는 게임 중독자들의 현실 회피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스타크래프트> 이후 E-스포츠가 활성화되었고, 여러 훌륭한 게임들이 연달아 발매되면서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아졌다(모바일 가챠 게임들이 다시 게임에 대한 인식을 바닥으로 처박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아직까지는 아니지만 앞으로 워킹 시뮬레이터나 비주얼 노벨 게임 같은 장르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게임의 정의를 설정하고 기준에 따라 게임을 평가하는 행위를 부정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곤 홈이나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를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도 아니다. 그런 논리라면 비평이나 평론 같은 행위는 전부 무의미한 행위가 되어버릴 것이다. 다만 구분 무용론자들의 주장대로 게임의 정의에 따라 게임의 가치를 '기계적으로' 재단하는 행위를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다. 가령 워킹 시뮬레이터나 비주얼 노벨, 클리커, 목표가 없는 시뮬레이션 게임 등을 비판하더라도, 그것이 게임의 정의라는 결코 절대적일 수 없는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비판하는 게 아니라, 해당 게임들이 게임 업계에 들어오면서 게임계 전체에 끼친 해악이나, 해당 게임들이 유행하게 되면서 유사한 장르의 게임 중 '게임의 정의에 부합하는' 과거의 게임에서 추구하였지만 잃어버리게 된 가치를 언급하는 식으로 비판해야 한다는 말이다. 심즈가 게임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플레이어에게 주었던 훌륭한 경험과 더불어 게임계 전체에 걸친 긍정적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따라서 심즈가 게임의 정의에 엄밀하게 부합하지 않는다는 측면만으로 비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정녕 심즈를 비판하고 싶다면, 심즈가 게임계에 들어오면서 게임계에 끼친 부정적 영향, 그리고 심즈를 비판했을 때 게임계 전체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력을 줄 수 있을지, 심즈를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한 게임은 있는지 등을 포괄적으로 고민해야 비로소 심즈의 비판에 설득력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게임의 경기론에 대한 고찰과 폭력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게임에 경쟁이라는 요소를 제외하기는 어렵다. 현재 '게임'이라고 알려진 작품들 중 대다수의 게임은 구조적으로 경쟁의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각5) 따라서 상대방과 경쟁하여 승패를 가린다는 경기로써 게임을 바라보는 것은 논리적으로 크게 무리한 해석이 아니다. 오히려 게임이라는 매체를 정의하기에 가장 정석적이면서 교과서적인 해석에 가깝다. 그럼에도 필자는 경쟁, 경기라는 단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하려 하지 않는 편이다.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있겠다. 현실적인 측면과 이데올로기 적인 측면이다.


출처는 Game Maker's Tool Kit. 게임 난이도 곡선


현실적인 측면부터 보자. 우선 경쟁이라는 단어는 플레이어의 맞수가 될 수 있는 상대방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싱글 플레이 게임에서 난이도 곡선에 따라 게임을 디자인하는 이유도 플레이어와 게임이 상호 간 맞수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너무 강대한 적을 상대로 내세우면 플레이어가 게임을 학습할 여지조차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플레이어와 게임 사이에서 맞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난이도를 다소 쉽게 설정하되 플레이어의 숙련도가 쌓일수록 점점 난이도를 올려가면서 플레이어와 게임이 지속적으로 맞수로 경쟁할 수 있도록 디자인하는 식이다. 다만 게임 중간에 보스전을 도입하듯이 난이도 곡선에서 날카롭게 솟아있는 부분을 넣는 이유는 맞수가 될 플레이어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하드 트레이닝'의 개념에 가깝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이 게임 난이도 곡선은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플레이어마다 게임에 대한 이해도와 경험이 천차만별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난이도 곡선 역시도 플레이어마다 다르게 체감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언급했던 잇 테이크스 투가 좋은 사례다. 게임에 경험이 많은 플레이어라면 이 게임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 역시도 그랬다. 하지만 정말 이 게임이 어렵지 않은 게임인가? 적어도 인터넷 커뮤니티 전반에 걸쳐 게임의 체감 난이도는 그다지 쉽지 않은 편이었다. 특히 게임의 구조와 문법에 익숙지 않은 커플들은 해당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상당한 좌절을 겪었다는 평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은 엔딩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추가 사례로 <둠 이터널(2020)>같은 게임은 어떨까. 이 게임의 싱글 캠페인은 FPS에 익숙한 숙련자 플레이어에게는 적당한 난이도 내지는 더 어려운 DLC를 클리어하기 위한 튜토리얼 정도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 게임의 싱글 캠페인이 모든 플레이어에게 튜토리얼 수준밖에 되지 않을 만큼 낮은 난이도는 아니다. 다수의 게임 커뮤니티에서 이 게임의 체감 난이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필자의 경우 FPS의 실력이 매우 떨어지는 편이라 '다 덤벼' 난이도(다른 게임의 노멀에 해당하는 무난한 난이도)조차 제법 고생하면서 클리어했다. 반대로 전혀 다른 게임 장르인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2017)>의 경우 가장 높은 난이도인 전술가 난이도도 필자에게는 할만한 수준이었다. 턴제 RPG에 대한 경험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필자 같은 케이스가 많을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다수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게임이든 간에 체감 난이도는 결코 동일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맞수가 될 수 있는 게임이 누군가에게는 너무 쉬워서 경쟁할 대상조차 못 되는 수준이 될 수 있으며, 다른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강대하여 경쟁할 생각조차 품기 어려울 만큼 강고한 벽으로 느껴질 수 있다. 게임의 난이도는 플레이어가 가지고 있는 게임에 대한 재능, 플레이 경험, 지능, 컨트롤(메카닉) 등 게임 외적인 다변수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이처럼 맞수의 존재는 게임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마다 항상 바뀔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누군가에게는 맞수가 될 수 있어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맞수가 될 수 없다. 플레이어에게 맞수로써 게임이 작동하지 않는데, 명목상으로 극복해야 할 난관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걸 '경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두 번째로는 경쟁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폭력이라는 속성 때문이다. 프로 스포츠를 사례로 들어보자. 프로야구 경기를 관람하는 팬들은 멀리 떨어져서 직접 경기를 진행하는 선수(플레이어)의 경기를 보고 즐거움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막상 경기를 뛰는 선수들은 상대 선수와 승패를 가리기 위해 서로 경쟁하면서 피비린내 나는 폭력을 경험한다. 경기장은 '매직 서클'이라는 이름의 전쟁터나 다름없다. '비디오' 게임에서 이러한 폭력성은 더욱 적나라해진다. 프로 스포츠 경기처럼 게임을 관람하기만 하는 관객의 위치가 아니라, 직접 게임을 플레이하는(프로 스포츠로 치면 직접 경기를 뛰는) 플레이어의 입장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만큼 경쟁이 갖고 있는 폭력이라는 속성에 직접적으로 노출되기 쉽다.


물론 폭력이라는 단어가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복싱이나 MMA 같은 스포츠는 매우 폭력적인 스포츠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복싱이나 MMA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선의의 경쟁 속에서 벌어지는 긍정적 의미의 폭력으로 보기 때문이다. 소쉬르의 기표와 기의 개념에 따르면, 하나의 단어와 해당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다의적일 수 있으며, 연결 관계 역시도 자의적으로 결정된다. 게임이 폭력적이라 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봐야 할 이유는 없다. 폭력이라는 단어 자체를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해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자. 분명 해당 단어와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개념적 의미는 자의적으로 연결된다. 그렇다는 뜻은, 폭력이라는 단어 역시도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위의 두 그림을 보자. 플레이어들이 생각하는 게임에 대한 폭력의 이미지는 전자와 같을 것이다. 축구에서 선수끼리 공을 차지하기 위해 몸싸움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기장 내에서 일어나는 선의의 경쟁 속에서 일어나는 폭력이다. 이런 폭력이 긍정적인 이미지의 폭력일 것이다. 하지만 게임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게임 속 폭력이 갖고 있는 의미와 이미지는 상당히 높은 확률로 후자에 해당한다. 이것이 소쉬르가 밝혀낸 기표와 기의 간 자의적 연결이다.


유사한 사례로 이번에는 게임이 아니라 역사적 사례를 들어보자. "일본의 식민지배는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이 됐다"는 주장이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이 말은 정말 전적으로 틀린 말일까? 그렇게만 보기는 어렵다. '근대'라는 개념의 함의가 너무나 넓은 데다가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고 치자. 근대가 낳은 개념 중에 도구적 이성(합리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원래 근대의 이성이라는 개념은 시민들의 자유와 해방을 가져오고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고자 생겨난 개념이었다. 하지만 근대의 부르주아 계급이 이성이라는 개념을 자신들만의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성은 인간과 자연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변질되었다. 일례로 게르만족이 유대인들을 공공의 적으로 적시하고 탄압한 것은 단순한 전근대적 야만이 아니라, 당시 어지러웠던 독일 사회를 하나의 체제로 통합하는 데 용이할 것이라는 나치의 도구적 이성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파시즘의 탄생 비화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교육칙어(좌)와 박정희 시대의 국민교육헌장(우)


도구적 이성이 파시즘이라는 근대의 괴물을 낳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이해했다면, 일본의 식민지배 역시도 '어떤 측면'에서는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이 됐다는 주장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당시 일본은 전체주의 국가였다. 획일화된 사회를 추구하며 인권의식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회 전체의 목적을 위해 개인의 탄압은 정당화됐다. 전형적인 도구적 이성의 특징이다. 일본의 전체주의적 특징은 당시 식민지였던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확대 재생산됐다. 해방 이후에도 독재정권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교육칙어다. 교육칙어란 천황에 대한 충성을 제일의 덕목으로 하는 교육지표로 전체주의적 교육의 표상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교육칙어라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정책을 그대로 따와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어냈다. 국가의식과 반공의식을 주입시켜 독재체제를 강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위 논리대로라면 이러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이 됐다는 주장은 '일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독재체제를 강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전체주의 국가의 도구적 이성이라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의 근대화일 뿐이다.


근대화의 양면성.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에게 근대란 전자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식민지 수탈론(내재적 발전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교육칙어가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어냈다는 역사적 사실을 몰라서 근대화론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근대'라는 단어는 야누스의 얼굴처럼 양면성을 가지고 있고, 근대라는 단어가 도구적 이성과 전체주의적 사고라는 부정적 의미뿐만 아니라 산업화, 자본주의화라는 긍정적 측면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의 '폭력성'에 대한 인식이 나뉘는 것처럼 근대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함의가 워낙 광범위하기에 의미 역시도 사람들마다 자의적으로 해석하게 될 수밖에 없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근대라는 단어의 인식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 즉 산업화의 측면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표면적인 근대화인 산업화로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인정하는 순간 후자의 이미지가 아니라 전자의 이미지까지 받아들이게 되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물론 근대라는 개념의 양면성/복잡성을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모두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고 근대라는 개념을 재인식하기 위해서 식민지 근대'성'론이라는 제3의 학파가 나타나기도 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다.


게임의 폭력성을 반박하는 서적들


따라서 게임의 폭력은 단어의 개념적 속성 상 어쩔 수 없이 이데올로기적 논란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필자가 게임 내에 존재하는 경쟁, 경기의 속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의식적으로 경기라는 단어를 회피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게임은 경기이고 경쟁이라는 개념을 인정하는 순간 게임이 폭력성을 증가시킨다는 기성세대의 인식과 프레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단어가 다의성을 띄는 한, 기표와 기의가 사람마다 자의적으로 연결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한 그럴 수밖에 없다. 위 사진처럼 다수의 게임 학자들은 게임이 폭력성을 증가시킨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연구를 내고 있다. 경기로서의 게임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이러한 학자들의 노고를 완전히 무의미하게 만드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게임을 정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필자는 두 가지 내러티브의 서론에서 그렉 코스티키엔의 주장대로 목표와 충돌이라는 대안 개념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사실 경쟁이라는 개념과 크게 차이는 없다. 그럼에도 필자는 이 개념이 게임이라는 정의에 더 부합하지 않을까 싶다. 대다수의 싱글 플레이 게임 같은 경우, 각 스테이지의 기믹이나 괴물의 패턴, 등장하는 위치 등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각6) 즉, 괴물의 패턴을 파악한다든지, 공간을 지각한다든지, 기믹을 파악하는 행위는 해결해야 할 상대가 '유동적'이라기보다는 '고정적'인 개념에 조금 더 가깝다. 따라서 상대방과 직접 경쟁한다기보다는(물론 이러한 관점도 틀린 건 아니다) 논리적 사고를 통해 정해진 문제를 해결하는 행위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싶다. 게임을 해결해야 할 어떤 문제라는 개념으로 바라본다면 자연스럽게 게임적 사고라 불리는 게이미피케이션과도 연관 짓기가 쉬워진다는 순기능도 있다. 따라서 필자는 조심스럽게 게임이란 규칙에 따라 개발자가 내준 문제와 '충돌'하며 정해진 목표를 해결하는 매체라고 규정짓고자 한다. 게임이란 프로그래밍된 것이고, 프로그래밍이란 철저하게 수학적으로 구성된 논리 체계이기 때문에 일종의 논리적 문제로 보는 게 잘못된 접근은 아닐 것이다.


물론 게임을 문제 해결로 규정짓는 것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생각일 뿐이고 자의적 규정에 불과하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다시피 필자는 게임이라는 매체를 기계적으로 규정하는 행위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임을 정의하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게임과 게임 아닌 것의 경계선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게임을 규정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순기능, 즉 다른 매체와 다르게 게임이라는 매체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이 있고, 구분 무용론자들의 주장대로 게임이라는 매체를 타 매체와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잃어버리게 되는 가치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게임이라는 개념을 규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게임을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게임의 종합예술화가 진행되고 모든 매체가 하나의 게임 속에 용광로처럼 한데 섞이면서 잃어버렸던 게임들만의 너무나도 소중한 경험과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게임들이 단순히 기술적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지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마땅히 사라져야 할 '적폐'가 아니라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치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다. 그 시절의 가치를 발굴함으로써 플레이어들은 소위 모바일 캐릭터 게임, 영화 같은 게임, 소설 같은 게임과 같은 현대의 일부 게임들을 단순히 '게임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비판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특정 게임들이 대두되고 과거의 게임들이 몰락하면서 상실한 가치를 제시하고 분석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해당 게임들을 더 설득력 있게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필자의 모든 글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아마도 내년에 필자가 쓰게 될 글의 일부는 기술의 발전과 장르 간 혼합 현상으로 인해 잃어버리게 된 게임의 가치에 대해 연구해보는 글을 써볼 예정이다.


끝.


각1) 프롬소프트웨어의 게임들처럼 여전히 이러한 철학을 유지하고 있는 게임은 존재한다.


각2) 퀘이크처럼 2D -> 3D로 옮겨가며 게임 디자인에 극명한 변화를 준 경우도 있기 때문에 모든 게임이 연관성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각3) 심시티 초기작의 경우 시나리오 모드에서 정해진 목표에 따라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 심즈의 경우도 <심즈 4에서는 시나리오 모드가 추가되어 목표가 생기기도 했다. 이러한 경우는 게임의 정의에 부합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기서 다루는 심시티와 심즈는 <심시티 3000>이나 심즈 초기작처럼 정해진 목표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심 시리즈에 한정하여 적용되는 논리다.


각4) 심시티의 재난 같은 게 난관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루어야 할 목표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플레이어를 방해하는 무언가로 보기보다는 현실의 모사로써 작동하는 시뮬레이션으로 보는 게 더 적합하다.


각5) 게임을 둘러싼 능력주의 논란과 평등의 필요성을 참고하라.


각6) 절차적 생성을 특징으로 하는 로그라이크나, 랜덤 인카운트처럼 무작위로 게임의 무대 및 난관이 배열되는 경우는 제외한다.


용어설명

매직 서클 : 요한 하위징아가 주창한 현실적 삶과 구분되는 놀이만의 구분되는 시공간적 개념을 뜻한다. 가장 쉬운 예시로는 축구장이 있다. 축구 경기에서 사용하는 경기장의 라인과 축구에서 흘러가는 시간은 현실의 시공간과 다른 규칙이 적용된다. 하루는 24시간이지만 축구 경기는 전후반 45분, 축구 경기장 내에서는 현실의 공간과 다르게 축구만의 규칙이 적용되는 식이다.

기표와 기의 : 소쉬르가 정의한 기호의 근본을 이루는 두 성분이다. 기표는 기호의 지각 가능하고 전달 가능한 물질적 부분이다. 그것은 소리일 수도 있고, 표기일 수도 있고, 한 단어를 이루는 표기의 집합일 수도 있다. 기의는 이와 대조적으로 독자나 청자의 내부에서 형성되는 기호의 개념적 부분이다. 가령 ‘나무’라는 문자 자체는 기표, 그 ‘나무’라는 문자의 의미, 혹은 그 문자의 발화를 듣고 (혹은 발화하면서)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개념이 기의이다. 이처럼 기표에 기의가 결합되어 기호로서의 단어 ‘나무’가 된다.


참고문헌

Jesper Juul, 장성진, 2005, 『하프 리얼 - 가상 세계와 실제 규칙 사이에 존재하는 비디오게임』, 비즈앤비즈.

https://www.youtube.com/watch?v=Jbn8IRmSq8M&t=4s

https://ninja-critics.blogspot.com/2020/10/id-chronicles-1-prehistoric_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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