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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또 Apr 22. 2016

당신은 그들이 아니에요,
그들은 당신이 아니에요

사랑할 수 없는 남자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 <아노말리사> 후기 제2편

<아노말리사> 후기 1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netsgo0319/9



<아노말리사>의 또 하나의 묘미는 OST다. 관객들은 영화 마지막쯤 이런저런 장면들로 꽤나 충격받은 상태에서 엔딩 크레딧을 멍하니 맞게 되는데, 바로 이때 나오는 OST는 마치 마이클이 직접 부르는 것만 같은 가사다.


https://youtu.be/zlb_oUlqYTc

None of them are you - Carter Burwell

'None of them are you' by Carter Burwell (Anomalisa OST)


When I see your face or hear a name
Or I'm introduced to someone new
It doesn't matter they're all the same
And none of them is you

내가 당신의 얼굴을 볼 때나 이름을 들을 때

혹은 처음 보는 누군가에게 내가 소개될 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들은 다 똑같으니까

게다가 그들은 당신이 아니죠


When I go to work or take a walk
And watch what other people do
I'll listen to their idle talk
And none of them is you
내가 일하러 갈 때나 걸을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하는 걸 볼 때면

나는 그들의 쓸 데 없는 얘기를 듣겠죠

그리고 그들은 당신이 아니죠


Where are you my dear?
Why I can't hear you?
How I wish that you were here
How I long to be near you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왜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죠?

당신이 여기 있기를 내가 얼마나 바라는지

내가 당신 곁에 있기를 내가 얼마나 바라는지

Sometimes at night I'll pass the time
Those endless sleepless hours in bed
I'll try to reconstruct your voice
But only hear their voice instead
어떤 밤에는, 나는 그냥 시간을 보내겠죠

끝없고 잠들 수 없는 침대에서의 시간들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리려고 애쓰겠죠

그러나 들리는 건 그들의 목소리들 뿐


They talk, they yell in that other voice
They flirt and whisper too
I'd love them if I had the choice
But none of them is you
그들은 그 다른 목소리로 말하고, 소리 지르죠

그들은 추근 덕대 기도하고 속삭이기도 해요

내가 그럴 수만 있다면, 그들을 사랑해보고 싶어요

하지만 그들은 당신이 아닌걸요


In a dream you came and held my hand
Our love was perfect in that sphere
The breeze was your whisper in that land
While the air stands still right here
꿈속에서 당신은 나에게 다가와 내 손을 잡았어요

그곳에서 우리의 사랑은 완벽했죠

그 땅에서 부는 바람은 당신의 속삭임이었어요

그 공기들은 아직도 바로 여기 남아있어요


No I've never met you my sweet dear
And my friends they say you don't exist
But friends are cowards full of fear
Afraid to look at what they'd missed

아니, 난 당신을 만난 적이 없죠 내 사랑

내 친구들은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요

하지만 그 친구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놓쳤는지 보기를 두려워하는, 겁만 많은 겁쟁이들일 뿐이에요


One day I'll be walking on the street
That crowded bustling faceless spread
I'll turn the corner and we'll meet
And I will be no longer dead
언젠가 내가 붐비고 북적이고 얼굴 없는 길을 걷고 있을 때

나는 코너를 돌 거고 우리는 만날 거예요

그리고 난 더 이상 죽지 않을 거예요



약간은 소름 끼치는 듯한 반주에 무심한 듯한 남자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노래한다.


그들은 당신이 아니에요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당신은 그들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들은 당신이 아니라는 것. 어찌 보면 영화의 주제와도 같은 이 OST를, 영화에서 찾아낸 서로 다른 두 가지 시선으로 듣기를 시도해보려고 한다.


#1 사랑의 관점에서


여자 주인공 리사는, 마이클과 에밀리와 함께 바에 간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듣고 자신이 매우 좋아하는 노래라며 따라 부르기까지 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특별하고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다 똑같다는 가사의 내용은, 에밀리의 입장에서는 사실 별다른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도 역시 알고 있지 않는가. 사랑하면 그 사람이 달라 보이고 특별해 보이고 언제나 함께 있고 싶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른 그 누구도 그 사람을 대체할 수는 없다. 즉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은 '당신'이 될 수 없다.

OST가 흘러나오던 바 장면

하지만 마이클의 입장에서 듣자면, 노래는 약간 다른 의미로 들리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로 말하기 때문에, '리사'라는 대상은 그들의 일부가 될 수 없다. 너무도 당연하게 말이다. 마이클에게 있어서 이러한 현상은, 사실상 사랑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된 리사'라는 대상이 우선하고 사랑은 그 뒤를 따라올 뿐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들이 아니다'라는 말의 의미는 리사와 마이클에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리사 :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은 그들이 아니에요
VS
마이클 : '당신은 그들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해요


바로 이러한 점이, 마이클이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불려 마땅한 이유이다. 마이클에게 사랑은 상황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리사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랑하는 것처럼 느꼈던 것도 사실상 리사의 목소리와 얼굴이 다른 이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사는 다르다. 리사가 '당신은 그들이 아니에요'라는 노래를 좋아한다는 점은, 리사가 그동안 제대로 사랑받지 못했고, 이제는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소망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이클이 사랑을 고백하고 잠자리를 같이하려고 할 때, 그리고 아내와 이혼할 테니 함께 LA에서 살 것을 제안할 때조차 만난 지 24시간이 되지도 않은 사이임에도 마이클의 제안을 모두 수락하는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던 자신의 목소리와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자신의 상처 있는 얼굴을 아름답다고, 예쁘다고, 사랑한다고 외치는 마이클의 모습을, 리사는 '진정한 사랑'의 결과라고 생각했을 것이니까 말이다. 이 때문에 마이클의 증상을 모르는 자존감 낮은 리사로서는, '누군가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줬구나. 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긍정적인 자기 인식 변화까지 일어난 것이다.


비극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서로 다른 정의 때문일까. 사랑이 이유가 되는 여자와 사랑이 결과가 되는 남자 사이의 하룻밤 사랑은 결국 마이클의 도망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마이클은, 벨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평생을 함께하자던 약속을 뒤로하고 결국 아노말리사로부터 도망친다. 전날 밤만 해도 남들과 다른 얼굴과 목소리로 마이클에게 예외적인 존재였던 리사 즉 아노말리사였는데. 결국 하루도 지나지 않아 마이클은 리사를 더 이상 남들과 구분할 수 없게 되며 고로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이다.


#2 외로움의 관점에서

 악몽 속에서 리사를 사랑하지 말라고 외치는 똑같은 얼굴의 여자들


살짝 시선을 비틀어서 들어보자. 사실 영화를 본 지 며칠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마이클이 그토록 지겨워하는 그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목소리들은 도대체 누구의 것이었기에 그토록 마이클의 프레골리 증후군을 만들어내고, 심지어는 꿈에서까지 마이클을 괴롭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이클도 어찌 보면, 누군가의 강박에 의해 정신질환자가 된 게 아닐까?


사실 상상만 해도 무서운 증후군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의 가족들과 연인이, 모두 같은 얼굴과 같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찾아온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 마이클이 세상에 보이는 반응 그 이상으로, 흥미로운 얼굴로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나는 결코 장담하지 못하겠다. 그 공포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를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데 나만 이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외로움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차라리 나도 그들과 같다면. 그냥 그들 중 하나로 살아가면, 아무 문제없는 삶이 될 수 있을 텐데.


마이클의 삶은 미운 오리 새끼 동화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아무리 고귀하고 더 아름다운 존재라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새끼 백조의 가족은 '백조 무리'가 아니라 '오리 엄마와 오리 형제들'이다. 결과론적으로는 내가 오리 형제들이 동경하던 그 백조 중 하나였더라도, 내가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어울리고자 했던 가족들과도 그리고 아름다운 백조들과도 어울리지 못하는 미운오리새끼다. 아름답고 새하얀 날개를 가진다고 해서, 그 힘든 시간들을 완전히 잊고 아무렇지 않게 새 출발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백조들의 무리 속에도, 오리 무리 속에도 끼지 못하는 외로운 주인공이 바로 미운 오리 새끼다.

 '당신은 그들이 아니에요'라는 노래의 메시지는,
백조들 속에서 옛 오리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미운오리새끼의 노래가 아닐까.


마이클 역시 마찬가지다. 마이클은 마치, 백조들 사회에 처음으로 끼어든 미운 오리 새끼와도 같은 존재로 보인다. '얼굴과 목소리만으로 서로를 구분할 수 있는 사회'가 오리들의 사회라면, '내면을 보아야 서로를 구분할 수 있는 사회'가 백조들의 사회다. 마이클은 어쩌다 보니 백조들의 사회에 흘러들어왔고 아직은 백조들의 내면을 보는 방법을 익히지 못했거나, 혹은 알았다가 잊어버린 한 마리 외로운 미운 오리 새끼이다. 미숙한 어른이고, 결핍된 인간이다. 그 속에서 불쌍한 마이클은, 자신의 옛 가족을 찾아 헤맨다.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그 무언가를.

노래하는 게이샤 인형

그리고 그 기다림 끝에 등장한 것은 상처 있는 아노말리사와 역시 온전치 못한 게이샤 인형뿐이다. (그리고 둘은 심지어 얼굴에 같은 위치의 상처를 갖고 있어 서로 닮아있기도 하다.) 이 둘은, 백조인 '우리'가 보기에 어딘가 부족하고 인기 없어 보이는 대상이다. 하지만 마이클에게는 마치 헤어졌던 가족처럼 기다리던 존재였기에 의심의 여지없이 아름답고 예쁘고 소중한 것들이다. 그리고 리사와 게이샤 인형 모두, 마이클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준다. 절대 누군가 대체할 수 없는 목소리로, 마이클이 원할 때면 그에게 노래를 불러줄 수 있는 천사들이다. 하지만 결국 인간인 리사는 다음날,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얼굴로 변해버린다. 그 원인이 전날 밤 나눴던 사랑 때문인 지는 몰라도, 마이클은 깨달았던 것이다. 결국 그녀도 자신이 찾던 옛 가족이 아니었다는 것을.


다만, 노래하는 게이샤 인형만이 영화 마지막까지 마이클의 곁을 지키며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준다.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인공적인 동작과 입모양, 떨어져 나간 표면들은 왠지 비극적이다. 마치 '너에게 사실 오리 가족 따위는 없어'라고 마이클에게 강력히 알리고 있는 것처럼.


그렇다. 결국 마이클에게는 '오리'였던 과거가 없었을 수도 있다. 스타 작가가 된 이후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들, 그리고 그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목소리의 실제 주인과의 뭔가 알 수 없는 사건으로 인해, 마이클은 사람들을 구분할 수 있는 백조의 능력을 잃고 자신이 오리였다는 망상에 빠져 그들을 기다려온 것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지만, 정작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할 사람을 찾을 수 없는 '스타 작가'라는 포지션에 의한 압박은, 그를 더욱더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늪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자신에게 결국 선물만을 바라는 아들이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외치면서 뒤에서는 수군대는 독자들이나 모두 같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마이클은 외로워진다.


내가 그럴 수만 있다면, 그들을 사랑해보고 싶어요.
하지만 그들은 당신이 아닌걸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현재다. 마이클은 지금 당장 좋든 싫든 자신을 사랑하는 팬들, 가족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과거의 어느 순간 자신이 원하고 좋아서 만든 인연들이다. 그가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심각한 병에 걸렸고, 그들이 지겹고 지루하게만 보인다고 해서 과거의 자신의 행동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된다. 그리고 마이클이 그렇게 찾고자 하는 '과거' 혹은 '사랑'은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변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그런 것은 아니다. 원래 사랑도 과거도 변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 원인은 온전히 다른 이들이 아닌 마이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이제는 OST가 약간 다르게 들리기 시작한다. 현재를 사랑할 수 없는 한 중년 남성의 외로움은, 비극적 이게도 과거와 과거의 사랑만을 향하고 있다. 노래 가사 속에서 친구들이 말하는 것처럼, 마이클이 그렇게 바라는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혹은 이미 존재하지만 마이클이 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기괴한 일본 인형의 모습처럼, 미완전한 마이클의 정신 상태가 만들어낸 슬픈 허구다. 이 때문에 마이클은 백조 같은 그들이 될 수 없고 그들 역시 마이클이 될 수 없다. 그로 인한 외로움은 마이클을 점점 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에 집착하게 하고 마이클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 간다.


하지만 마이클은 인정해야만 한다. 결국은 그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 중 하나로서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다시 익혀야 할 것이다. 자신이 강연해서 했던 말처럼, 인간은 누구나 사랑할 사람이 있으니까. 


인간이란 무엇일까요? 아픔은 무엇일까요? 산다는 건 무엇일까요?
누구에게나 사랑할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마이클이 그들이 아니고, 그들도 마이클이 아닌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서로가 대체 불가능한 존재임을 깨닫고 그들의 내면과 아픔을 살펴보는 예전의 마이클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빈다. 그는 분명 그걸 잘 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괜히 고객 서비스 자기계발서로 스타가 된 작가는 아닐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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